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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왜 그렇게 앉아 있나요?

by 답설재 2024. 4. 22.

 

 

 

비는 오는데 그렇게 앉아 있으니까 좀 민망합니다.

나는 아예 그 벤치나 의자에 앉지 않으려고 몸이 무거우면 선 채로 좀 쉬었다 걷지만, 그렇게 하는 건 나도 그렇게 앉게 되면 지금 그 모습과 한 치의 다름이 없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민망하겠지요. 아니, 그 벤치에 앉게 되는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은 것입니다.

 

왜 혼자 그렇게 앉아 있습니까?

역시 노년의 문제겠지요?

 

"노년에 관하여"(키케로)라는 책 혹 읽어보셨습니까?

키케로는 흔히 '노년에는 큰일을 할 수 없다' '노년에는 몸이 쇠약해진다' '노년은 거의 모든 쾌락을 앗아간다' '노년이 되면 죽을 날이 멀지 않다'고 불평들을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반박합니다.

"노년에도 정치 활동과 정신 활동은 물론 농사일을 할 수 있다, 체력 저하는 절도 있는 생활로 늦출 수 있으며, 정신 활동을 늘림으로써 체력에서 잃은 것을 보상받을 수 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 감퇴는 오히려 노년의 큰 축복이다. 그래야만 정신이 제대로 계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인생의 모든 시기가 죽음에 노출되어 있으며, 노인은 젊은이가 바라는 것, 즉 장수를 이미 누렸다는 점에서 젊은이보다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정신 나간 것 같습니까? 사실은 나도 그 논리가 그렇게 절실하게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쓴 "노년"은 어떨까요? 무려 770페이지쯤 되는 책이거든요.

그걸 다 이야기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겠지요. 온통 노년은 어렵고 비참하고 허탈하고 우울하다는 그런 얘기였고, 결론은 "노년이 우리의 이전 삶의 우스꽝스러운 하찮은 모방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해결책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의미를 주는 목표들을 계속하여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이든, 집단이든, 대의명분이든, 사회적 혹은 정치적 일이든, 지적·창조적 일이든, 그 무엇에 헌신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론이 아쉬워서 다음, 그다음 문장을 자꾸 읽어나갔습니다. "도덕주의자들의 충고와는 반대로, 우리는 나이가 상당히 들어서까지도 강렬한 열정들을 오래 보존하기를 바라야 한다. 그 열정들은 우리가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사랑을 통하여, 우정을 통하여, 분노를 통하여, 연민을 통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며, 그 덕분에 삶은 가치를 보존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행동해야 하는 이유, 또는 말해야 하는 이유가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좀 현실적인 문제를 덧붙였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노년을 '준비'하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돈을 저축하고, 은퇴 생활을 할 곳을 정하고, 취미를 만드는 것에 그칠 뿐이다. 그날이 와도 우리는 거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모든 환상들이 사라지고 생명의 열기가 식었다 하더라도, 계속 삶에 밀착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노년에 대해 너무 생각하지 말고, 정당하고 참여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낫다."

 

보부아르는 " 우리의 삶에 의미를 주는 목표들을 계속하여 추구하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고 했고, 돈, 은퇴 생활을 할 곳, 취미, 그런 건 대단한 것이 아닌 것처럼 얘기했지만, 차라리 바로 그게 넉넉하면 좋겠지요?

아쉽지만 보부아르의 저 노력도 우리에겐 그리 현실적이질 않네요.

 

자꾸 성가시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긴 하지만 "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戒老錄, 소노 아야코)라는 책은 어떨까요?

나는 사실은 그녀 자신이 늙기도 전에 쓴 그 책의 내용이 차라리 마음에 들었습니다. 최후는 자연에 맡기는 것도 좋다는 생각도 그중 하나입니다. 까짓 거 죽은 후에야 내가 알 바 아니라는 거죠. 사실은 뭐... 굳이 아니라고 할 것도 없다 싶었습니다. 전에 지금보다는 몸 상태가 좀 나을 때 자주 오르던 뒷산 중턱의 어느 산소는 장군석이나 상석 등으로 보아 당대에는 내로라 한 사람의 무덤이 분명한데 풍우는 그 상석의 글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게 해 버려서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쓸쓸함을 감출 수 없게 했습니다.

이런! 소노 아야코 이야기를 한 가지만 더 해고 싶은데 딴 이야기로 넘어갈 뻔했습니다.

그녀는 그 책 머리말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극도로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입장에서, 노인이 완전히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중증 치매에 대해서는 거의 공포감을 갖고 있지 않다. 내가 그렇게 되면 이미 나는 고통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누군가가 이 점에 있어서 힘들다 해도 그것은 내가 알 바가 아니다. 그게 싫다면 내가 어딘가에 공공연하게 버려질 수도 있겠지만, 정신이 나간 상태이기 때문에 별로 외롭지도 괴롭지도 않을 것이므로 태연할 것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아직 의식이 남아 있는 상태일 때다. 늙음을 자각할 수 있고 주관적으로 괴로워할 입장에 놓인 상태가 두려운 것이다."

 

"내가 아직 의식이 남아 있는 상태일 때"가 두렵다?

지금의 우리가 곧 부딪히게 될 상태를 이야기한 거죠? 아니 지금이 바로 그런 상태일 수도 있겠습니다. 

날이 밝자마자 나왔다가 우산이 없어서 그냥 앉아 있습니까?

아침은 먹었습니까? 못 먹었을 수도 있겠지요.

외롭습니까? 친구나 친지가 있어봤자 외롭긴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이 찾지 않습니까? 그런 경우가 한둘도 아니니까 부끄러워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성가시다고 생각하면 능력이 있고 여건이 괜찮은데도 시설에 맡겨버리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이 아파트의 어느 집에서는 본인은 가지 않겠다고 애절하게 부탁하고 자식은 그렇게 좋은 데를 왜 그러느냐고 하는 걸 저는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뭐 어떤 경우라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노인이니까요. 몇 가지의 애로는 다 있으니까요. 우리는 노인이어서 이렇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게 되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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