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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제자16

알베르 카뮈 · 장 그르니에 《카뮈 ­­­- 그르니에 서한집》 알베르 카뮈·장 그르니에 《카뮈 ­­­- 그르니에 서한집》김화영 옮김, 책세상 2012­      2012년에 구입해 놓았던 책이다. 보관할 책과 버릴 책으로 구분해서 과감하게 버리기로 하니까 더러 섭섭하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한데, 버리는 데 재미가 붙으니까 덜 읽었어도 '버릴까?' 싶을 때가 있다. 카뮈와 그르니에가 주고받은 235편의 이 서한집도 이미 '절판'이어서 덩달아 시시한 느낌을 받았을까, 여남은 편 읽고 '그만 읽고 버릴까?' 했는데 큰일 날 뻔했다. 읽어나갈수록 재미가 있어서 거의 단숨에 읽었다. 그르니에와 카뮈는 '돈독한' 관계였다. '돈독한'보다는 '애절한'이 낫겠다. 스승과 제자로 만나서 카뮈가 노벨문학상을 받고 교통사고로 죽을 때까지 그 관계를 이어갔다. 그들의 관계는 점점 더 깊어.. 2024. 11. 20.
천하 고얀 놈 같으니라고, 네가 내 제자라니... 이런 일이 있나!식당 매니저란 사람은 나를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잠시 망설임도 없이 뜨거운 삼계탕 그릇을 녀석 앞에 먼저 놓았다. 눈을 내려깐 채였다. 어느 쪽에 먼저 놓아야 하는지 오며 가며 다 봐 놨다는 뜻이 분명했다.그럼, 좋다. 녀석이라도 그걸 얼른 들어서 내 앞으로 옮겨 놓으려는 시늉이라도 하면 될 일 아닌가! 좀 뜨겁다 해도 그렇다. 내가 오죽 잘 대처하겠는가. "야, 이 사람아! 아무려면 어떤가! 그냥 두게! 어설프게 그러다가 사고 나네!" 어쩌고 하면서 말렸을 일 아닌가. 그런데 이런 천하 고얀 놈을 봤나!이 녀석조차 하던 이야기 끝에 지은 그 미소를 그대로 머금은 채 천연덕스럽게 제 앞에 놓인 그 탕을 그대로 놓아둔 채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고 있었다.허, 참! 이런 게 다 내 제자라는.. 2024. 10. 9.
그 교실에서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숙에게 (2024.5.31) 숙아! 벌써 오십 년이 다 되었지? 아침마다 우리가 그 교실에서 만나던 날들… 넌 습관적으로 내 표정을 살폈지. 그 모습이 왜 잊히지 않는지… 성적이 좋지 않았던 넌 6학년 때에도 내내 그대로였어. 아이들은 웃거나 놀리지도 않고 그냥 ‘꼴찌’라고만 했지. 당연한 일이어서 비웃거나 놀리거나 할 일이 아니라고 여겼겠지. 넌 주눅이 들어 있었어. 학교는 주눅이 드는 곳? 네가 처음부터 내 표정을 살펴보며 지낸 건 학교에 주눅이 들어서였던 것이 분명해. 담임이란 언제 어떤 언짢은 소리를 할지 모르는 존재였겠지. 너의 그 표정은 내내 변하지 않았어. 졸업하고는 마음이 편해졌을까? 주눅 들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을까? 그렇지만 일찌감치 사회로 나갔고 꼬박꼬박 학력(學歷)을 묻는 이 사회 어디서나 ‘초등학교 졸업’이.. 2024. 5. 31.
수레국화의 영광 성희가 나와 함께 지낸 건 37년 전 1년간이었지만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성희 남편이 저 뜰을 밀밭으로 만들자고 해서 이효석의 소설 속 달밤을 떠올리며 그런가보다 했는데 그 이듬해 가을날 둘이 와서 수레국화 씨를 뿌려주었고 저렇게 온통 수레국화 천지가 된 집으로 2년간 지냈습니다. 첫해는 7월에 절정이었고 이듬해는 6월에 절정이었습니다. 그 7월 혹은 6월에 나는 수레국화에 빠져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꿈결 같은 시간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수레국화가 자라서 뜰을 뒤덮기 전이나 활짝 피었다가 지고 나면 1년 내내 심지어 한겨울에도 잡초와 전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성희 부부는 잡초 중에도 예쁜 게 있다고 했고 그건 나도 알지만 그중에는 저 뜰을 점.. 2023. 3. 2.
스물여덟 살 친구 같은 아이 이 아이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제자? 글쎄요... 그렇게 부르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요. 제가 교장일 때 만난 아이예요. 교장실에 들어와서 이야기하고... 누가 결재받으러 들어오면 부탁하지 않아도 저만치 떨어져 뭔가를 살펴보고... "그럼 제자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 이렇게 물을 사람도 있지 않을까요? "교장이라고 해서 그 학교 아이들을 다 제자라고 하나요?" 그럼 부끄러워지지 않겠어요? 요즘은 담임을 했어도 선생 취급 못 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요. 그럼 친구? 나이 차가 엄청 많이 나는 친구? 어쨌든 나는 좋습니다. 그 아이를 제자라고 하면 과분하긴 해도 나는 좋고, 왠지 친구 같은 느낌도 있으니까요. 결재 좀 해달라고 머리를 조아리며 다가온 것도 아니고, 굳이 뭘 좀 가르쳐달라고.. 2022. 12. 1.
내 제자의「궤도 이탈」 내 제자가 궤도 이탈을 했습니다. 경황 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수술을 하다가 동맥이 끊어져서 피를 많이 흘렸고 기억과 지능도 저하되었다고 했습니다. 사십 년 전, 우리 교실 맨 앞자리에서 말똥말똥 나를 바라보던 초등학교 1학년 그 아이, 어째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서 부모와 함께 생활하는 사정이 늘 안타까웠는데, 아이 아버지가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는 기억력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며 영상통화를 해달라고 간절한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연전에는 내 사무실로 찾아오기도 했고 간간히 통화도 했지만 나에 대한 기억이 삭제되어 영화나 드라마 주인공처럼 "누구시죠?" "잘 모르겠는데요?" 시치미를 떼듯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이름을 부르자 바로 "선생님~" 했고 묻는 말에 또박또박 대답도 해서 '별 일 아.. 2021. 3. 3.
「석홍이의 눈물」 석홍이의 눈물 석홍이가 운다. 말썽쟁이 석홍이가 운다. 하루도 싸우지 않는 날이 없고 툭하면 여자애들을 울려 선생님께 매일 혼나도 울기는커녕 오히려 씨익 웃던 석홍이가 책상 밑으로 들어가 눈물을 닦는다. 주먹으로 쓱쓱 닦는다. 저 땜에 불려 나와 선생님 앞에서 고개 숙인 아버질 보고. ―정은미(1962~ ) 출처 : 조선일보 '가슴으로 읽는 동시'(2018.8.16)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8/15/2018081502741.html?utm_source=urlcopy&utm_medium=share&utm_campaign=news 1 초등학교 1학년 준이는 교회 사찰집사 아들입니다. 아빠는 양말, 장갑 등 양말 공장 물건을 자전거로 배달해주는 일.. 2018. 8. 17.
정민 《스승의 옥편》 정민 《스승의 옥편》 마음산책 2007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후 댁에 갔을 때, 하도 많이 찾아서 반 이상 말려들어간 민중서관판 한한대자전을 보았다. 12책으로 된 한화대사전도 손때가 절어 너덜너덜했다. 선생님도 찾고 또 찾으셨구나. 둥근 돋보기로도 한 눈을 찡그려가면서 그 깨알 같은 글씨를 찾고 또 찾으시던 모습이 떠올라 참 많이 울었다. 사모님의 분부로 선생님의 손때 묻은 그 책들을 집으로 가져왔다. 헐어 바스라지고 끝이 말려들어간 사전을 한 장 한 장 다리미로 다려서 폈다. 접착제로 붙이고 수선해서 책상맡에 곱게 모셔두었다. 지금도 사전에 코를 박으면 선생님의 체취가 또렷이 느껴진다. 내 조그만 성취에도 당신 일처럼 기뻐하시던 어지신 모습도 생전처럼 떠오른다.(15~16) '漢文學者가 쓴 책'이면 해.. 2018. 6. 18.
"선생님, 죽지 말아요!" "선생님, 죽지 말아요!" 향기(香氣)와 향수(鄕愁) : 아이들이 커피 찌꺼기로 방향제를 만드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전철역으로 들어가다가 저 아이들 냄새가 풍겨서 곁으로 다가가 한참동안 바라보았습니다. Ⅰ 어느 해안도시에서 지금 비행기(아니면 기차, 아니면 배, 배도 아니면 .. 2015. 4. 12.
드디어 나를 가르치게 된 '그 애' 선생 노릇을 제대로 한 것도 아닌데 자꾸 제자 이야기를 하게 되어 쑥스럽습니다. 이 글은, 지난 2008년 겨울, 아직 교장이었을 때,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라는 곳에서 발간하는 『교육광장』이라는 잡지에 실린 글입니다. 마침내 제자에게서 배우는 바가 있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한두 가지이겠습니까만…… 2014. 2. 12.
인연-영혼 가을이 가고 있습니다. 내년에도 다시 올 가을, 끊임없이 반복될 가을입니다. 2012년 가을, 혹은 마지막 가을일 수도 있습니다. 나로 말하면 그 어떤 가을도 다 괜찮고 고맙고 좋은 가을입니다. 아무리 찬란한 가을도, 바람에 휩쓸려가는 낙엽 소리가 들리면 쓸쓸해지고, 골목길 조용한 곳에 모여 있는 낙엽을 보면 더 쓸쓸해집니다. 이듬해 가을이 올 때까지는 설명이 필요없게 됩니다. 이 가을에 37년 전 어느 교실에서, 내가 그 학교를 예상보다 일찍 떠나는 섭섭한 일로 겨우 5, 6개월? 날마다 나를 바라보던 한 여학생, 그 여학생이 어른이 되어 낳은 아이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 아이는 나를 만나는 순간에 할 인사를 애써서 연습했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랬는지, 인사는 나누었는데 생각이 나지 않습.. 2012. 11. 10.
작가가 된 종란을 위해 월간 『한국수필』 7월호 갈피에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연두색 종이여서 눈에 띄었으므로 편지부터 읽었습니다. 편지조차 공개하면 그는 일단 놀라워할 것 같고, 이렇게 하는 게 맘에 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것 저것 따질 형편이 아닙니다. 나이대로라면 "아직 새파란 주제에……" 꼴 같지 않다고 여길 사람도 많겠지만, 나로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건 뭐라고 할까, 약속 같은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로서는 이 편지를 다 읽었다고 버릴 수 없고, 그렇다고 어디 넣어서 끌어안고 다닐 수도 없고, 잘 보관한다고 해봤자 별 수 없다는 건 얼마든지 있었던 일이고, 여기 실어두면 안전할 뿐만 아니라 무슨 증거 같은 것이 되어 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 그가 작.. 2012. 7.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