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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제자13

수레국화의 영광 성희가 나와 함께 지낸 건 37년 전 1년간이었지만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성희 남편이 저 뜰을 밀밭으로 만들자고 해서 이효석의 소설 속 달밤을 떠올리며 그런가보다 했는데 그 이듬해 가을날 둘이 와서 수레국화 씨를 뿌려주었고 저렇게 온통 수레국화 천지가 된 집으로 2년간 지냈습니다. 첫해는 7월에 절정이었고 이듬해는 6월에 절정이었습니다. 그 7월 혹은 6월에 나는 수레국화에 빠져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꿈결 같은 시간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수레국화가 자라서 뜰을 뒤덮기 전이나 활짝 피었다가 지고 나면 1년 내내 심지어 한겨울에도 잡초와 전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성희 부부는 잡초 중에도 예쁜 게 있다고 했고 그건 나도 알지만 그중에는 저 뜰을 점.. 2023. 3. 2.
스물여덟 살 친구 같은 아이 이 아이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제자? 글쎄요... 그렇게 부르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요. 제가 교장일 때 만난 아이예요. 교장실에 들어와서 이야기하고... 누가 결재받으러 들어오면 부탁하지 않아도 저만치 떨어져 뭔가를 살펴보고... "그럼 제자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 이렇게 물을 사람도 있지 않을까요? "교장이라고 해서 그 학교 아이들을 다 제자라고 하나요?" 그럼 부끄러워지지 않겠어요? 요즘은 담임을 했어도 선생 취급 못 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요. 그럼 친구? 나이 차가 엄청 많이 나는 친구? 어쨌든 나는 좋습니다. 그 아이를 제자라고 하면 과분하긴 해도 나는 좋고, 왠지 친구 같은 느낌도 있으니까요. 결재 좀 해달라고 머리를 조아리며 다가온 것도 아니고, 굳이 뭘 좀 가르쳐달라고.. 2022. 12. 1.
내 제자의「궤도 이탈」 내 제자가 궤도 이탈을 했습니다. 경황 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수술을 하다가 동맥이 끊어져서 피를 많이 흘렸고 기억과 지능도 저하되었다고 했습니다. 사십 년 전, 우리 교실 맨 앞자리에서 말똥말똥 나를 바라보던 초등학교 1학년 그 아이, 어째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서 부모와 함께 생활하는 사정이 늘 안타까웠는데, 아이 아버지가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는 기억력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며 영상통화를 해달라고 간절한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연전에는 내 사무실로 찾아오기도 했고 간간히 통화도 했지만 나에 대한 기억이 삭제되어 영화나 드라마 주인공처럼 "누구시죠?" "잘 모르겠는데요?" 시치미를 떼듯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이름을 부르자 바로 "선생님~" 했고 묻는 말에 또박또박 대답도 해서 '별 일 아.. 2021. 3. 3.
「석홍이의 눈물」 석홍이의 눈물 석홍이가 운다. 말썽쟁이 석홍이가 운다. 하루도 싸우지 않는 날이 없고 툭하면 여자애들을 울려 선생님께 매일 혼나도 울기는커녕 오히려 씨익 웃던 석홍이가 책상 밑으로 들어가 눈물을 닦는다. 주먹으로 쓱쓱 닦는다. 저 땜에 불려 나와 선생님 앞에서 고개 숙인 아버질 보고. ―정은미(1962~ ) 출처 : 조선일보 '가슴으로 읽는 동시'(2018.8.16)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8/15/2018081502741.html?utm_source=urlcopy&utm_medium=share&utm_campaign=news 1 초등학교 1학년 준이는 교회 사찰집사 아들입니다. 아빠는 양말, 장갑 등 양말 공장 물건을 자전거로 배달해주는 일.. 2018. 8. 17.
정민 《스승의 옥편》 정민 《스승의 옥편》 마음산책 2007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후 댁에 갔을 때, 하도 많이 찾아서 반 이상 말려들어간 민중서관판 한한대자전을 보았다. 12책으로 된 한화대사전도 손때가 절어 너덜너덜했다. 선생님도 찾고 또 찾으셨구나. 둥근 돋보기로도 한 눈을 찡그려가면서 그 깨알 같은 글씨를 찾고 또 찾으시던 모습이 떠올라 참 많이 울었다. 사모님의 분부로 선생님의 손때 묻은 그 책들을 집으로 가져왔다. 헐어 바스라지고 끝이 말려들어간 사전을 한 장 한 장 다리미로 다려서 폈다. 접착제로 붙이고 수선해서 책상맡에 곱게 모셔두었다. 지금도 사전에 코를 박으면 선생님의 체취가 또렷이 느껴진다. 내 조그만 성취에도 당신 일처럼 기뻐하시던 어지신 모습도 생전처럼 떠오른다.(15~16) '漢文學者가 쓴 책'이면 해.. 2018. 6. 18.
"선생님, 죽지 말아요!" "선생님, 죽지 말아요!" 향기(香氣)와 향수(鄕愁) : 아이들이 커피 찌꺼기로 방향제를 만드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전철역으로 들어가다가 저 아이들 냄새가 풍겨서 곁으로 다가가 한참동안 바라보았습니다. Ⅰ 어느 해안도시에서 지금 비행기(아니면 기차, 아니면 배, 배도 아니면 .. 2015. 4. 12.
드디어 나를 가르치게 된 '그 애' 선생 노릇을 제대로 한 것도 아닌데 자꾸 제자 이야기를 하게 되어 쑥스럽습니다. 이 글은, 지난 2008년 겨울, 아직 교장이었을 때,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라는 곳에서 발간하는 『교육광장』이라는 잡지에 실린 글입니다. 마침내 제자에게서 배우는 바가 있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한두 가지이겠습니까만…… 2014. 2. 12.
인연-영혼 가을이 가고 있습니다. 내년에도 다시 올 가을, 끊임없이 반복될 가을입니다. 2012년 가을, 혹은 마지막 가을일 수도 있습니다. 나로 말하면 그 어떤 가을도 다 괜찮고 고맙고 좋은 가을입니다. 아무리 찬란한 가을도, 바람에 휩쓸려가는 낙엽 소리가 들리면 쓸쓸해지고, 골목길 조용한 곳에 모여 있는 낙엽을 보면 더 쓸쓸해집니다. 이듬해 가을이 올 때까지는 설명이 필요없게 됩니다. 이 가을에 37년 전 어느 교실에서, 내가 그 학교를 예상보다 일찍 떠나는 섭섭한 일로 겨우 5, 6개월? 날마다 나를 바라보던 한 여학생, 그 여학생이 어른이 되어 낳은 아이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 아이는 나를 만나는 순간에 할 인사를 애써서 연습했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랬는지, 인사는 나누었는데 생각이 나지 않습.. 2012. 11. 10.
작가가 된 종란을 위해 월간 『한국수필』 7월호 갈피에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연두색 종이여서 눈에 띄었으므로 편지부터 읽었습니다. 편지조차 공개하면 그는 일단 놀라워할 것 같고, 이렇게 하는 게 맘에 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것 저것 따질 형편이 아닙니다. 나이대로라면 "아직 새파란 주제에……" 꼴 같지 않다고 여길 사람도 많겠지만, 나로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건 뭐라고 할까, 약속 같은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로서는 이 편지를 다 읽었다고 버릴 수 없고, 그렇다고 어디 넣어서 끌어안고 다닐 수도 없고, 잘 보관한다고 해봤자 별 수 없다는 건 얼마든지 있었던 일이고, 여기 실어두면 안전할 뿐만 아니라 무슨 증거 같은 것이 되어 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 그가 작.. 2012. 7. 19.
글 쓰는 여우 Ⅱ 지난번 글 「거짓말을 자꾸 하면」은 거짓말에 대해 크게 느낀 바가 있어서 쓴 글이었습니다. 거짓말을 밥먹듯하는 사람을 보면 어느새 자신마저 그 거짓말에 물이 흠뻑 들어서 스스로 거짓말을 하는 줄도 모르게 된다는 것이며, 드디어 아주 신이 나서 그 거짓말을 점점 더 보기좋게(듣기 좋게) 각색하게 됨으로써 망나니이면서도 착한 사람 행세를 하고, 불효막심한 녀석이면서도 효자노릇은 독판 한 것으로 내세우며 다닌다는 걸 고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 그런데 이것 좀 보십시오! 그 글을 읽은 제자 한 명이 저에게 거짓말 좀 하겠다며 저를 보고 40년 전 그 눈빛과 지금의 눈빛이 너무나 같고 단지 옷차림과 머리색이 조금 바뀌었을 뿐이라는 거짓말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래, 자신은 얼굴 까만 10살 소녀이고, 저는 ‘20.. 2012. 7. 2.
나에게 나이 한 살을 보내준 사람 나에게 나이 한 살을 보내준 사람 Ⅰ 임진년(壬辰年)이 되었습니다. 또 한 살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좋아할 사람도 있겠지만 마음이 무겁습니다. 워낙 공평한 일이고, 불평할 일도 아니긴 합니다. 그럼 "이제 몇 살이냐?"고 물으면 어떤 숙녀분들처럼 그건 비밀이라며 능청을 떨고 .. 2012. 1. 24.
사랑하는 내 제자 사랑하는 내 제자 ♣ 맨 처음 6학년을 맡아 아이들(?)을 졸업시킨 것은 1971년입니다. 그 중에는 1969년에 교사가 되어 막바로 담임한 아이, 1970년에 연이어 담임한 아이도 있었으나까 내리 3년을 제게서 배운 불행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의 나이는 지금 대개 50을 훨씬 넘었습니다. .. 2011. 1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