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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스물여덟 살 친구 같은 아이

by 답설재 2022. 12. 1.

 

 

 

이 아이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제자?

글쎄요... 그렇게 부르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요.

제가 교장일 때 만난 아이예요. 교장실에 들어와서 이야기하고... 누가 결재받으러 들어오면 부탁하지 않아도 저만치 떨어져 뭔가를 살펴보고...

"그럼 제자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 이렇게 물을 사람도 있지 않을까요? "교장이라고 해서 그 학교 아이들을 다 제자라고 하나요?"

그럼 부끄러워지지 않겠어요? 요즘은 담임을 했어도 선생 취급 못 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요.

그럼 친구? 나이 차가 엄청 많이 나는 친구?

 

어쨌든 나는 좋습니다.

그 아이를 제자라고 하면 과분하긴 해도 나는 좋고, 왠지 친구 같은 느낌도 있으니까요.

결재 좀 해달라고 머리를 조아리며 다가온 것도 아니고, 굳이 뭘 좀 가르쳐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그저 열두 살 아이가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내 견해를 묻고 내게 제 생각도 얘기해주고 그랬으니까요.

뭐랄까요? 내가 지시했거나 가르친 것으로 그 아이의 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그 아이와 나는 3년간 만나면서 그중 그 아이가 6학년 1학기를 보내던 마지막 6개월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만났고, 이후 16년 잊지 않고 있었으니까요.

그 16년 간 내가 다른 학교 교장이던 2년 6개월에도, 그 이후에도 끊어졌다가 이어졌다가 하며 살았는데 공부를 좀 오래 한, 스물여덟의 그 아이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네요.

 

  

(전략)

 

저는 지금 대학교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보람찼다가 다 지겨워졌다가 다시 힘을 냈다가 파도치는 바다에서 왼종일 서핑을 하는 것 같아요

서핑을 실제로 해본 적도 없는데요

 

그랬는데 오랜만에 선생님 메일을 보니 갑자기 어렸을 때 매번 쉬고 갔던 바위 하나를 만난 느낌이에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도 혼자서 고민 많고 혼자서 스트레스를 만들어 받곤 하던 괜히 인생 힘들게 살던 애였던 거 같은데 그럼에도 그때가 제일 행복하고 좋았던 것 같아요

정말 힘들 때는 초등학생 시절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빌면서 잠들 때도 있었거든요

그때 선생님을 생각하고 메일함을 열어보고 편지를 보내볼 걸 그랬어요

제가 어릴 때에도, 지금에도 슬며시 나타나 제 인생에 다시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 주셔서 감사해요

 

이렇게 누군가에게 사적인 일로 메일을 보내는 일 자체도 너무 오래된 것만 같아요

 

글 쓰는 게 정말 즐거웠었는데 왜 이걸 잊고 살았나 싶네요 지금 이렇게 메일 드리는 것도 새삼 너무 재밌고 행복해요!  

 

선생님은 잘 지내고 계시죠? 건강은 괜찮으신지 궁금해요 

저도 이제 공부도 끝나고 여유가 생겼으니 선생님께 식사라도 한 번 대접하고 싶어요!

 

선생님 시간 되시면 직접 한 번 뵈러 가고 싶은데 시간 괜찮으세요?

 

(후략)

 

 

하루를 비워 집 앞 카페를 다녀가서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 메시지 받고 나는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나는 지금 이승에서의 어떤 구체적인 꿈같은 걸 가지지 않고 살아가고 있으니까 텅 빈 것 같은 마음으로 그 아이가 부디 건강하게 직장 잘 다니고 공부를 더 하게 되거든 다시 별 탈 없이 즐겁게 매진하고 아프지 말고 그러다가 좋은 사람 만나면(그 아이 말대로 "매일 함께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 결혼하고... 따뜻하게 살아가기를 기원해주면 되니까요.

때로는 "나에겐 이런 친구도 있어" 하고 자랑스러워할 수도 있으니까요.

 

 

오랜만에 선생님 뵈어서 너무 좋았어요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셔서 감사했어요 선생님은 많은 학생들 보셨을 텐데 저에게 복이 있을 것 같다고 말씀해주셔서 갑자기 그냥 좀 안심이 됐어요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든 그 복으로 적당히 잘 풀리며 가겠거니 애써 긍정적으로 자꾸 생각해보려구요 좀 더 적극적으로 도전해보자는 생각도 들고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선생님도 잘 지내시고 추운 겨울 잘 보내시구요 날 풀리면 한 번 더 뵈러 갈게요 건강 늘 잘 챙기세요!

 

 

이 아이는 내게 '거친 바다를 지키는 등대'라는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아늑하기만 한 것 같아도 온갖 일이 다 벌어지는 학교라는 사회의 교장실에 앉아 있는 나를 지켜보며 그 생각을 했겠지요?

마음 속에 그 이름을 넣어 가지고 지내면서 '거친 바다를 지키는 등대이면서 이까짓 걸 가지고...' 하며 의연하게 지내던 시절도 있었으니까 그것만 가지고도 그 아이를 내 친구라도 해도 좋을 것 같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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