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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그리운 지하주차장

by 답설재 2022. 12. 6.

 

 

 

"지하주차장은 자주 이용하지만 항상 썰렁하고 적막한 느낌이 드는 공간입니다.

음악이 있는 곳은 안정감이 있고, 편안함이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에, 우리 주차장에도 음악 방송을 송출하여 하루를 여는 아침에는 희망과 즐거움을,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에는 하루 동안의 스트레스를 녹여주는 편안한 공간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음악방송 소리가 크거나, 드물게 세대에 송출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선로의 문제로 생활지원센터로 연락하여 주시면 점검 및 소리를 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아파트 출입구 게시판에서 이 공고문을 보았습니다.

아침에 잠깐 나갔다 들어오며 누군가 크게 털어놓은 음악을 들으며 정신이 하나도 없다 싶었는데('에이, 미친놈...') 이래서 그랬던 것이었습니다.

 

삼십여 년 전이었습니다. 허구한 날 늦은 밤 퇴근할 때마다 어느 여가수의 애절한 이별 노래 그 한 곡만 약 10,000 데시벨쯤으로 들으며 들어오는 놈(?) 때문에 잠깐씩 '세상에 저런 놈(?)이 있나!' 했는데 이번에는 아주 통째로 그런 경우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지하주차장은 썰렁하고 적막하지요.

그럼요! 나도 거기에는 공감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썰렁함과 적막함을 즐기며(잘 이용하며) 지냈습니다.

눈 오시는 날, 주차장으로 들어가며 그 안정감을 느꼈고, 조금 더 천천히 올 걸 그랬나? 호기를 부리기도 했고, 비가 내리는 늦은 밤의 그곳에서는 20분쯤 듣고 있던 곡을 다 듣기도 했습니다.  그날 나는 많이 쓸쓸해서 눈씨울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뭔가 좋은 일로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서 차에 둔 물건을 챙기지도 않은 채 집으로 올라가 가족들을 만난 다음에야 생각나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간 날도 물론 있었습니다.

직업을 잃은 채 살아가는 지금 그 시간들이 무척 그립습니다. 그때의 그 적막하고 썰렁한, 쓸쓸한 지하주차장이 보고 싶습니다.

 

나는 주차장에 내려가 바로 출차하지는 않습니다.

바쁜 날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 시간만큼은 그렇게는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나는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하차한 적도 없었습니다.

잠깐 뭔가 생각하고 라디오에서 들리는 소리를 다 듣고 내렸습니다.

 

주차장은 그런 곳 아닌가 싶었습니다.

혼자 있을 수 있는 곳,  생각을 할 수 있는 곳, 잠깐이지만 몸도 마음도 자유로운 곳...

그런 곳을 빼앗는 것은 도둑질 아니면 훼방, 폭력... 그런 것 아닐까요?

 

저 공고문이 붙은 날의 음악은 클래식이었습니다.

클래식이면 괜찮은 것일까요? 누구 맘대로? 나도 클래식파(?)입니다. 종일 라디오를 들어야 한다 해도 나는 클래식을 들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음악 방송 중에는 클래식을 많이 들려주는 곳이 있긴 하지만 그 방송도 MC가 너무 많이 지껄여대고 심지어 초대손님인가 뭔가를 불러다 놓으면 다른 날보다 더욱더 많이 지껄여 한심하다 싶을 때가 흔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아파트에는 클래식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알아보나 마나 수두룩합니다. 그렇다면 그 어떤 음악을 들려준다 해도 그건 시간과 공간을 도둑질하는 것이고 훼방이고 폭력입니다.

 

다행히 음악 송출은 단 하루 만에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꽤나 괜찮은 아파트가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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