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가 나와 함께 지낸 건 37년 전 1년간이었지만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성희 남편이 저 뜰을 밀밭으로 만들자고 해서 이효석의 소설 속 달밤을 떠올리며 그런가보다 했는데 그 이듬해 가을날 둘이 와서 수레국화 씨를 뿌려주었고 저렇게 온통 수레국화 천지가 된 집으로 2년간 지냈습니다.
첫해는 7월에 절정이었고 이듬해는 6월에 절정이었습니다. 그 7월 혹은 6월에 나는 수레국화에 빠져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꿈결 같은 시간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수레국화가 자라서 뜰을 뒤덮기 전이나 활짝 피었다가 지고 나면 1년 내내 심지어 한겨울에도 잡초와 전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성희 부부는 잡초 중에도 예쁜 게 있다고 했고 그건 나도 알지만 그중에는 저 뜰을 점령해 버리려는 것들이 많아서 두려웠고, 마침내 나는 저기에 잔디를 심어달라고 했습니다.
섭섭하지만 해 뜨는 쪽 출입구 근처는 남아 있고, 거기 하늘높이 솟아 오른 세 그루 잣나무 주변에는 대여섯 가지 나무와 함께 수레국화와 쑥부쟁이가 남아 있으니까 앞으로는 거기를 기대하기로 했습니다.
최근 수레국화가 예사로운 꽃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소설《어머니의 연인》(우르스 비트머)의 그 어머니의 아버지는 딸에게 아주 억압적이었습니다.
그걸 다 옮겨 쓸 수는 없고 조금만 옮겨보겠습니다.
"아무도 널 원하지 않아! 단 한 사람도! 그건 네 기질 때문이야!" 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 눈앞에서 꺼지란 말이다!" ─ 그는 자신의 부인과 함께 밀라노로 여행을 갈 계획이었다. 근사한 호텔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고급 와인을 마신 후, 스칼라 극장에서 「라 트라비아타」를 보거나, 아니면 적어도 「라 토스카」 정도는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린 어머니(클라라)를 며칠간 돌봐주겠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모들, 사촌들, 대모들, 친구들, 그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그 애 말야? 절대 안 돼!" 정말 급한 경우에나 부탁을 하게 되는 알마조차도 그녀를 돌봐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했다. 그녀의 기질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여섯 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녀의 기질 때문이었다? 이 책 전체가 그 얘기이고 직접적인 묘사만 해도 길어서 어쩔 수 없이 시작 부분만 옮깁니다.
어쩌면 그녀의 기질이라는 건, 그녀가 종종 시선을 내면으로 향한 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머릿속의 고열을 느끼면서 방 한 구석에 굳어진 채로 서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럴 때의 그녀는 숨도 거의 쉬지 않았고, 가끔 신음 소리만 내뱉었다. 그녀의 내부에서는 모든 것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지만, 바깥을 향해서는 죽어 있는 살갗일 뿐이었다.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다. (...)
이제 수레국화가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럴 때 그녀의 내부에서는 충만한 광채와 빛의 세계가 펼쳐졌다. 그 세계엔 숲과 밭, 그리고 먼 곳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었다. 나비와 개똥벌레가 있었다. 먼 옛날의 기사들이 보였다. 그녀 또한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자신이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칼을 사방으로 휘두르며 환호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황홀한 드레스에 리본을 두르고 하얀 신발을 신고 있었으며, 수레국화로 풍성하게 장식한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모든 이들의 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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