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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동 ○○호의 밤

by 답설재 2023. 2. 21.

 

 

 

○○동 ○호는 전에는 우리와 아래윗집이었습니다.

아무리 이런 세상이지만 인사는 하고 지냈습니다.

네 식구 중 아저씨는 어느 분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만 아주머니와 아들딸은 엘리베이터에서라도 자주 만났습니다.

 

"안녕?"

"안녕하세요?"

누나는 잘 응대해 주었습니다.

"인사해!"

"안녕.. 하.. 세.. 요."

남동생은 누나가 독촉해야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마지못해 인사를 받아주었고 그나마 혼자 만나면 꼭 모른 척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남매는 연년생이고 신체도 건장해서 얼핏 보면 누가 손위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지만 남동생의 행동거지에 대한 누나의 간섭 혹은 책임감은 남달라서 꼬박꼬박 참견하곤 했습니다.

남동생은 남동생대로 사사건건 고집대로 하고 싶어 했고, 그럴수록 누나는 기어이 그 고집을 꺾으려고 하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남매가 함께 다니는 것도 한때여서 중학생이 된 누나는 잘 보이지 않게 되었고 주로 남동생만 만나게 되었는데 쓸쓸해 보였습니다.

 

지난 1월 한겨울의 어느 수요일 점심때였습니다.

수요일마다 알뜰시장이 열리는데 남동생이 반소매 짧은 바지 차림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어서 웬일이냐고 놀라서 물었더니 괜찮다고, 떡볶이만 사서 얼른 들어갈 거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집에 누구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혼자라고 했습니다.

혼자 집에 남아 있다가 배가 고팠겠지요.

 

아주머니는 아파트 앞에서 가게를 하다가 잘 되지 않아서 접었는데 언젠가 물어봤더니 좀 먼 동네 식당에 일을 나가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아름답고 친절한 분이고 경우가 바르고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릴 듯한 여성이었습니다.

이런 얘긴 난처하긴 하지만 그 댁에서는 다투는 소리가 들려올 때가 있고 아이들만 남은 날에는 종일 공으로 벽치기를 하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습니다.

한창 자라는 나이의 남자애로서는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풀리는 날이 왜 없겠습니까.

 

어느 저녁, 거실과 큰방이 언제나 대낮처럼 환하던 그 댁에 자그마한 등만 하나 희미하게 켜진 걸 보았고, 이후로는 늘 그렇게 지내는 걸 매일 밤 확인했습니다.

마침내 그 불빛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린 이제 이 작은 등만으로도 충분하게 되었어요..."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되자 나는 마음이 착잡하고 쓸쓸했습니다.

아직 젊은 분들인데... 나같은 늙은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아직 젊은 그분들은 그렇게 지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는 ○○동 ○호네 가족이 다만 사랑은 잊지 않고 사랑은 잃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가족 이야기는 해피 엔딩, 엔딩? 아니 엔딩이 아니라 '~ing'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은 쓸쓸해 보이는 저 거실과 큰방에 얼른 (봄이 오기 전에, 좀 늦으면 초봄에라도) 환한 등이 켜지기를 기다리며 매일 밤 그걸 확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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