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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천하 고얀 놈 같으니라고, 네가 내 제자라니...

by 답설재 2024. 10. 9.

 

 

 

이런 일이 있나!

식당 매니저란 사람은 나를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잠시 망설임도 없이 뜨거운 삼계탕 그릇을 녀석 앞에 먼저 놓았다. 눈을 내려깐 채였다. 어느 쪽에 먼저 놓아야 하는지 오며 가며 다 봐 놨다는 뜻이 분명했다.

그럼, 좋다. 녀석이라도 그걸 얼른 들어서 내 앞으로 옮겨 놓으려는 시늉이라도 하면 될 일 아닌가! 좀 뜨겁다 해도 그렇다. 내가 오죽 잘 대처하겠는가. "야, 이 사람아! 아무려면 어떤가! 그냥 두게! 어설프게 그러다가 사고 나네!" 어쩌고 하면서 말렸을 일 아닌가.

 

그런데 이런 천하 고얀 놈을 봤나!

이 녀석조차 하던 이야기 끝에 지은 그 미소를 그대로 머금은 채 천연덕스럽게 제 앞에 놓인 그 탕을 그대로 놓아둔 채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고 있었다.

허, 참! 이런 게 다 내 제자라는 얘기가 아닌가!

그놈의 삼계탕이 아무리 맛있다 해도 그렇지, 내가 그 수모를 그대로 덮어 놓고 그걸 먹고 앉아 있어야 했나?

녀석은 그날 당장 누굴 만나거나, 나중에 제 동기생들을 만나면 이걸 이야기라고, 글쎄 음식점 직원이 선생님보다 내 앞에 먼저 삼계탕을 놓아주더라고, 그래 모른 척 먼저 받아버렸다면서 저희들끼리 낄낄거리며 '처웃을' 것 아닌가.

천하 고얀 놈들 같으니라고!

 

오랜만에 만난 녀석은 녀석답게 전보다 배가 더 나오고, 머리칼은 거의 다 빠져서 모자를 벗으니까 수염이 없어서 그렇지 완전 달마상이었다. 하얗게 다 세어버린 데다가 정수리 부분으로부터 이마 쪽으로는 몇 올 남지 않은 나보다 확실히 더 '걸망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나는 녀석의 손을 잡고 몇 마디 안부를 묻고 대답하며 '이 녀석 봐라, 얼굴은 피둥피둥하고 혈색도 좋아서 내가 빈약해 보이겠구나. 더구나 내 얼굴엔 검버섯이 추하게 나 있고, 이리저리 주름이 가서 더 딱하게 보이겠지?' 생각했는데, 녀석은 이미 내 생각을 다 읽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아이고, 선생님! 그 곱던 얼굴에 주름이 다 가버렸네요!"

버르장머리 없는 놈!

 

점심을 먹으며 녀석은 나에겐 기회도 주지 않고 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졸업하고 두어 번 만났겠지? 마지막 만난 건 20년은 되었겠지?

녀석은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았다. 어디 가서 누구를 만나 저런 이야기를 할까 싶은 것까지 미주알고주알 망설이거나 계산하지 않고 다 털어놓았다.

'그래, 내가 네 이야기를 못 들어줄 이유가 어디 있겠나. 그래, 괜찮다, 다 괜찮다.'

나는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더러 웃기도 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69세라, 너도 이젠 노인이구나. 그렇지만 내가 죽었다는 소식은 들어야만 한다! 알겠나? 부디 건강하거라. 감기 조심하고 차 조심하거라. 웬만하면 다투거나 싸우거나 하지 않아야 한다. 네 아내와 정답게 지내고 네 아들과 친하게 지내라...... 알겠나! 에이, 측은한 놈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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