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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논단

5월을 앞두고 한 아이를 생각함 (2025.4.25)

by 답설재 2025. 4. 25.

 

 

 

4월 중순인데도 자욱하게 눈이 내려 겨울옷 넣어두기를 망설였지만 벚꽃은 곧 이를 데 없이 화사했고, TV는 그새 초여름 기온이라면서 반팔 옷 입은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음 주에는 5월이 시작되고 어린이날이 다가온다. 더할 수 없이 소중한 저 아이들을 위해 갖가지 행사를 계획하고 있을 것이다. 그날 집에만 있을 수 있는 휴일이어서 다행이기도 하다. 즐거움과 기쁨으로 지낼 아이들이 많지만 그 하루도 평소처럼 보내야 하는 아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D시 중심가 한 초등학교에서 1학년을 담임하던 해 늦가을, 다른 교육기관에서 파견근무를 하게 되었다. 파견은 직원 취급도 받지 못하면서 근무는 더 힘들고 봉급은 소속기관에서 받게 되어 있어 1년에 한 번쯤 적을 둔 기관을 찾아가 미안한 마음을 보여야 했다.

 

아이들과 헤어진 지 1년 만에 그 학교를 찾아간 것이다.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고 행정실 봉급 담당 직원과 마주 앉아 있을 때였다. “우리 선생님이다! 우리 선생님!”

 

지난해 담임했던 아이들이 창문 너머로 들여다보며 야단들이었다. 얼른 나가서 함께 지내던 날들에 그랬던 대로 일일이 손을 잡아주고 그만 돌아가라고 했는데, 한 아이만은 눈물을 흘리며 서 있다가 그새 또 새로 몰려든 아이들 틈에 끼어 있었다. 다시 나가 내일 또 만나자는 약속이나 하는 것처럼 정겨운 손들을 잡아주며 돌아가라고 했지만 녀석은 막무가내였다. 얼굴과 옷소매가 눈물로 온통 범벅이 되어 있었다.

 

조그만 교회 사찰집사의 아들이었다. 가난했다. 부모가 가난했으므로 그 애도 가난했다. 자전거로 양말, 장갑 배달을 하던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불구가 되었다. 목사님과 그 가족이 모두 착하여 집사 가족에게 따뜻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마음들이 오죽했으랴.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눈물을 머금고 아들이 자라 버젓한 인물이 되는 날까지 이까짓 어려움들은 참고 견뎌내자고 다짐하며 애잔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 배려 속에 주눅 들지 않고 지내고 싶을 녀석의 마음을 외면하기가 싫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릎을 내주곤 해서 그걸 시샘하는 어머니들의 입에 오르내렸지만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행복하게만 지내다가 헤어졌던 것이다. 그 시간이 그리웠을까?

 

말없이 울기만 하는 조그만 그 얼굴을 손수건으로, 손수건이 다 젖어 휴지로 닦아주었다. 아이는 눈물과 흐느낌 때문에 내 물음에 대답을 해줄 상황이 아니었다. 자그마한 몸에서 어떻게 그 많은 눈물이 흐를 수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행정실로 데리고 들어가 지난해처럼 무릎에 앉히고 눈물을 닦아주고 있을 때 앞의 직원이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랑이 그리워서 그래요.”

 

무슨 소리인가? 가난하긴 해도 부모가 다 있지 않으냐고 하자 에둘러 덧붙였다. “궁핍한 가정에 태어나 아무 학교나 다니면 될 것을 하필이면 이름난 학교에 다니면서 서러움과 고생이 얼마나 심하겠어요.”

 

그날 그 아이는 한때 익숙했던 품에 안겨 그렇게 흐느끼다가 끝내 한마디 말도 못 한 채 돌아갔고, 이후 안부를 알 수 없는 채 다시 세월이 흘렀다. 아이는 중학생이 되었고, 그해 봄 현장학습 가는 날 아침,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사망자 명단에 그 이름이 실렸다.

 

그렇게 끝났다. 기억만 남았다. 이 기억은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도 모른 채 살다 간 그 아이에 대한 원망이다. 세상에 잠시 머물렀던 그 영혼을 담은 초라한 모습의 애잔함이 잊히지 않는 데 대한 원망이다.

 

이 기억은 분노이기도 하다. 아이 하나 책임지지 못하는 데 대한 교사로서의 분노이다. 무능하고 무력한 교육자였던 것에 대한, 그런 주제에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을 내세운, 허망한 언약에 대한 분노이다.

 

교육이란 어떤 것일까? 그 아이에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었을까? 하루하루 얼마나 고달픈 삶으로써 그 짧은 인생을 채워 마감했는가? 그날 그 어린것의 어디에 숨어 있던 눈물이 그렇게 흘렀을까? 교육은 우선 그날그날 아이가 있는 그곳, 그 자리에서 행복하게 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