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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논단

어떤 책을 읽혀야 할까? (2025.1.24)

by 답설재 2025. 1. 24.

 

 

 

 

옛 얘기가 되었다. 학교보다는 스스로 읽은 책에서 더 많이 배웠다는 그 교육부장관이 시중의 좋은 책을 골라 초중고별 권장도서로 정하자고 했다. 그런 목록을 정하고 있는 나라의 교육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자 누군가 이름난 책의 경우 번역본이 수십 권씩이라고 했고, 그렇게 유명한 책이 분야별로 얼마나 될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데다가 그 많은 책을 누가, 언제까지, 어디서, 어떤 기준으로 읽어서 분석·선정하고 어떤 형태의 목록을 만들어야 할지 암담한 일이 되었다.

 

장관 측에서는 이미 필독·권장 도서를 정하고 있는 사례를 들어 각 학교에서도 잘하고 있는 그 작업을 확대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관련 회의에 초대된 출판사 대표들과 원로작가들도 이구동성 실현되면 좋겠다는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또 어떤 출판사에서는 시골 학교에는 목록에 선정되는 책을 무료로 보내주겠다는 호의를 나타내기도 했다.

 

이어 장관이 추천한 한 인사가 책을 일일이 다 읽지 않아도 작가나 번역자, 출판사를 보면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는 실용적 안을 내면서 인근 도서관의 협조를 받아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며칠간 집중작업을 거쳐 가려진 도서가 벌써 산더미처럼 쌓이는 걸 보게 되었는데, 실제로 그 작업은 아직 시작 단계에 지나지 않아서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 점점 더 미궁에 빠지는 느낌일 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사업은 돌연 중단되고 말았다. 일을 함께하던 교육부 직원들은 작업의 어려움 때문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그런 시도를 한 사실조차 몰랐을 전국의 교사나 학생들이 알면 안타까워할 일일 수도 있었다.

 

책이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1950년대 이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공부한 세대는 그 사실을 사무치게 느꼈을 것이다. 웬만한 가정엔 책이 아예 단 한 권도 없었다. 혹 있었다면 천자문, 명심보감 같은 한문책이나 춘향전, 별주부전 같은 옛 소설쯤이었다.

 

그러니까 교과서는 그야말로 유일무이한, 귀하고 고맙기만 한 책이어서 두꺼운 종이로 표지를 싸서 보물처럼 취급했고, 혹 가벼이 여겼다 하면 부모나 교사로부터 호된 꾸중을 들어도 전혀 가혹한 일이 아니었다. 또 그 세대가 기억하는 재미있는 동화는 “토끼와 거북” “의좋은 형제”처럼 교과서에 실린 것들이기 마련이었고, 교과서를 만들어 내는 문교부는 도대체 어떤 곳인지 동경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모두들 얼마나 책을 읽고 싶어 했고, 새 학기 교과서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교과서를 받은 날, 귀갓길에서 이미 두어 권은 다 읽어버렸더라는 경험담을 들은 자녀들은 그런 시절도 있었나 싶었을 것이다.

 

그러던 세상이 변해서 모처럼 전국 초중고 학생들을 위한 좋은 책 목록을 만들어주려던 그 장관의 의욕적인 시도가 결국 실현되지 못하고 만 것인데, 이미 수많은 책이 나와 있는데도 점점 더 많이 쏟아지고 있어 급변하는 상황까지 고려하는 목록을 정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즉 세상의 수많은 책을 하나의 보편적·객관적인 기준으로써 평가·통제하기가 어렵게 된 변화상을 실감했을 것이었다.

 

요즘은 읽을거리가 책에 국한되지도 않는다. 굳이 PC를 쓸 필요도 없고, 언제 어디서나 스마트폰 검색만 하면 웬만한 지식은 당장 다 찾을 수 있어서 누구에게 무엇을 알려주고 가르쳐준다는 것이 거의 무의미한 일이 되었고, 남을 가르치려 드는 이가 존경을 받기는커녕 자칫하면 짜증을 유발하기 일쑤이다. 초등학생들도 이미 개별 혹은 모임별로 구성해 낸 지식을 인터넷에 탑재하기도 해서 이제 어른이라고 아는 척하다가는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다.

 

그럼 저 학생들에게 어떤 책을 읽혀야 할까? 그걸 정해주겠다는 건 어쨌든 불합리한 일이 되어버린 것 같다. 누구나 꼭 읽어야 할 책이 있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가정에서는 자녀의 개성과 요구에 맞추어 주려고 애쓰기 마련이고, 학교에서는 ‘기준(계획)’에 따른 학습활동을 거치는 과정에서 학생들 스스로 필요한 책과 정보를 찾게 되며, 이때의 ‘기준’이 바로 국가에서 정하는 교육과정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