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소설 『개미』 『타나토노트』 등으로 우리나라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기 시작한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이후로도 여러 작품을 발표하면서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베르베르의 인기가 높은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가 암기하기에 딱 좋은 온갖 지식이 소설 속에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평론가들은 뭐라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 독자들이 현실 혹은 실제상황을 방불케 하는 그의 공상·상상의 세계에 흥미를 느끼기 때문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는 암기를 싫어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학교생활에 적응하기가 어려워서 그 걱정을 잊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데, 선생님들이 늘 뭔가 외우라고 한 것이 원인이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수능시험은 제대로 봤을까? 모르겠다. 어쨌든 그가 우리나라에서 공부했다면 ‘별 볼 일 없는 학생’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컸을 것 같다.
이 나라는 지능이 높으면 성공 가능성도 높다고 보는 경향이 있고, 기억을 잘하는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머리가 좋다” “머리가 좋아서 암기를 잘한다”라고 하는 것처럼, 기억력·암기력이 지능과 거의 동의어로 취급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근거가 극히 희박한 논리라는 건 웬만한 사람은 쉽게 설명할 수 있긴 하지만 희한하게도 그 논리가 실제적이긴 하다는 걸 부정하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국어 교과서에 ‘토끼와 거북’이라는 우화가 나올 때 초등학교에 들어간 세대들은 다 기억한다. 국어 시험에 꼭 출제되던 “토끼와 거북 이야기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은 당연하다는 듯 마련된 □□에 ‘노력’이라는 두 글자를 써넣어야 했다. 지식의 암기이고 강요이고 틀에 맞추는 교육이었다.
지금은 달라졌을까? “전에는 중요한 내용만 골라서 필기했거든요. 그러다가 시험에서 크게 당했어요. 그다음부터는 웬만하면 다 써요. 교수님이 그냥 우스갯소리로 하신 것까지도 다!”(학생 A) “독창적인 의견을 썼다가 학점이 망가졌거든요. 고등학교 때처럼 암기를 주로 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B)라고 한 학생들의 실패담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서울대에서는 누가 A+을 받는가?』)
그런 교수는 아는 게 있어야 토론도 가능하고 창의력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아예 졸업할 때까지 그렇게 가르치고, 결국 학생도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수용적으로 쌓은 지식이 있어야 그걸 바탕으로 창의적인 게 나오죠. 운동으로 치면 수용적 사고력은 근력이고 기초체력인 거예요”(C)
기억을 중시하면 암기를 강조·강요할 수밖에 없고, 그 누구도 지식을 전수하는 사람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다. 이론이나 토론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생의 사고를 존중한다면(요즘 말로 학습권을 존중한다면) 토끼와 거북이 주는 교훈은 사람마다 다른 건 물론이고, 사람마다 그 생각이 여러 가지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거기에 무슨 기억이 필요하고 암기가 필요하겠는가!
암기 외에도 좋은 학습활동은 많다. 계획, 비교, 대조, 회상, 조사, 관찰, 발표, 청취, 문답, 토의, 의논, 결정, 선택, 게임, 번역, 해석, 유추, 연상, 추론, 요약, 종합, 정리, 평가, 작문, 전시, 분석, 제작, 독서……
베르베르라면 여기에 덧붙여 훨씬 풍부한 내용을 열거할 것 같다. 한국을 즐겨 찾는 그는 우리의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한국은 젊은이들을 틀에 맞추려 한다. 대입제도를 보면 한국의 경제 시스템에 맞는 인재를 키워내려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창의력이 없어진다. 대학에 들어가고 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모두가 똑같아진다면 나중에 큰 책임을 지는 자리에서 개인적 창의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여러 가지 지식부터 암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은밀히 강요된다. 그러나 그런 공부는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은 공개적이다(“대학에서 얻은 지식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다치바나 다카시). 지식을 암기하는 활동은 가혹한 단순노동에 지나지 않는다!(18세기, 피히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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