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에나 교사가 되어서나 교과서 핵심 암기에 진력이 난 터여서 “이젠 그렇게 가르쳐선 안 된다!”는 장학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감동의 전율을 느꼈다. 50여 년 전 지역교육청 연수회 때였다.
열심히 외워서 암기의 능력으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구한 경우가 대부분이긴 했지만 때마침 좋은 책들이 번역되어 쏟아지던 시절이라 마음껏 호기심을 충족하며 지내다가 대학입학시험에서 낭패를 보고 결국 어쭙잖은 직장에서 고개 숙이고 지내는 경우도 적진 않았다.
장학사들은 교과서는 기본 자료일 뿐이므로 교사는 모름지기 교육과정(curriculum)의 취지에 따라 세상의 수많은 자료를 적절히 활용해서 학생들의 사고활동을 조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실마다 적어도 70명이었고 2부제, 3부제도 시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생활’을 통해 가르쳐야 한다면서 존 듀이(『민주주의와 교육』) 이야기도 하고, 소푸트니크 쇼크로 인한 변화의 당위성도 반복해서 들려주었다. 이미 정리해 놓은 지식을 그대로 전수(傳授)하지 말고 학생들이 학자와 같은 방법으로 탐구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말이 그렇지 쉽진 않았다. 일제고사 성적을 교장실 그래프에 나타내던 시절이어서 밑줄 치게 하고 암기시키는 데 매진하던 교사들은 별로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곧 앨빈 토플러의 주장이 등장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책을 찾았다(『제3의 물결』). 토플러는 공장모형으로 운영되는 학교교육은 읽기와 쓰기, 산수를 중심으로 역사 등의 과목도 좀 가르치긴 했지만, 그 배후에 숨겨진 ‘시간엄수’ ‘복종’ ‘기계적인 반복 작업’ 등 세 가지 덕목은 산업사회의 기반으로서 훨씬 더 중요한 교육과정으로 작용했다고 폭로해 버렸다.
그는 특히 한국교육에 대해 직설적으로 “풀빵 찍듯 하는 교육”이라고 했다. 학생들을 대량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공장모형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 교육방법은 한때 세계적으로 지배적이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부적응아로 홀대받은 아인슈타인이 뮌헨의 루이트폴트 김나지움에서 절대복종과 암송, 주입식 교육을 강요하는 권위주의에 염증을 느껴 교사를 ‘중위(中尉)’에 비유했던 것이 그 사례일 것이다.
문제는 우리 교육은 이러한 지적을 수용하지 못하고 여전히 암기교육의 전통을 고수한 것이다. 새로운 학설, 새로운 정책·제도가 끊임없이 등장하고 사라져 갔지만 어느 것 하나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이다.
혁신을 추구해 온 그 흐름을 운동(movement)으로 본다면 그동안 우리 사회의 변화를 통틀어 교육운동만큼 활발하고 간단없었던 것은 드물 것이다. 다만 변화를 지향하는 도도한 흐름 속에서도 주입식 교육만은 그 전통을 면면히 이어와서 우리나라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토플러는 “입시위주 주입식 교육은 결국 한국의 경쟁력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비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교육부는 2025년부터 AI 디지털 교과서를 단계적으로 도입할 예정이라고 한다. 새로운 교과서로써 모든 학생이 창의성, 비판적 사고력, 협업능력, 소통 등 이 시대가 요구하는 역량을 키우도록 수업의 혁명적 변화를 불러일으키겠다는 것이다.
오죽 좋겠는가! 그 변화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한 교육혁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의구심을 갖게 되는 걸 부정할 수도 없다. 교육부에서는 교육과정, 교과서에 관한 새로운 정책, 제도를 마련할 때마다 구태의연한 수업에 일대 혁신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지만 거의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았다.
수능시험과 학교교육의 방향을 일치시켜야 한다. 수능의 문제점은 교육과정이 지향하는 개념·역량보다 문항의 변별력을 중시하는 출제에 있고, 교사들은 이러한 경향에서 사교육 전문가에게 뒤질 수밖에 없다는 것쯤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아니,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수능시험의 경향이 학교교육에서 이탈되었는가, 아니면 학교교육이 수능시험 경향에서 이탈되었는가? 입시제도는 수업과 학습의 변화를 견인한다. 현행 수능시험에 큰 변화가 없다면 다른 정책·제도가 어떻게 달라진다 해도 큰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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