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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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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 《악마대학교 이야기》 김동식(중편소설) 《악마대학교 이야기》『현대문학』 2024년 9월호      악마대학교 이야기  김동식  악마는 두꺼운 전공 서적 여럿을 품에 안고 다급히 이동했다. 어찌나 급한지 중간중간 짧은 순간이동까지 섞어가며 겨우 도착한 그곳, '악마대학교'의 한 강의실이다. 뒷문을 열고 들어서자, 학구열에 불타는(의미 그대로 진짜 불타기도 하는) 악마들이 한가득 앉아 있다. 늦게 온 이 악마 또한 그곳에 섞여 들어가 무거운 서적을 내려놓았다. 교수 악마는 그를 힐끔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가 하던 강의를 계속했다."자, 그러면 다음 발표자. 어떤 수법을 준비해 왔지?"긴장한 악마 하나가 벌떡 일어나 강당 앞으로 순간이동을 하다가 '악'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우스꽝스러울 수 있는 광경이지만 다들 웃지 못했다. 그만.. 2024. 9. 7.
글을 쓰는 이유 : 내 기명(記名) 칼럼 이 글을곁의 남편에게 큰소리로 읽어주며끝내는 둘 다 울고 맙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지난 8월 16일 점심때, 익명의 독자가 이 댓글을 달아주었다. 왜 위로가 되었는지 묻지 않겠다고, 이 말씀만으로도 충분하고 과분하기 때문이라고 답글을 썼다. 나는 이 독자의 댓글과 내 답글을 잊고 있었다.그래서 8월 말에 신문사에 원고를 보내며 이제 이 칼럼을 그만 쓰겠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닐까, 몇 번이나 생각하다가 한 달만 더 미뤄보기로 했었다. 교육에 관한 글은 독자층이 아주 얇다. 매달 한 편씩 17년째 연재하고 있지만 '더 써서 뭘 하겠는가' 여러 번 회의감을 느끼면서 '다음 달엔, 다음 달엔' 하며 그만 쓰겠다고 신문사에 연락해야 한다고 다짐하며 지내다가 저 댓글 읽고 아무래도 몇 달은 더 써야겠다고, 용기.. 2024. 9. 5.
무라사키 시키부 《겐지 이야기 ①》 무라사키 시키부 《겐지 이야기 ①》김난주 옮김, 한길사 2010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를 쓴 그 무라사키 시키부의 작품(소설, 모노가타리)으로, 그 일기에는 당시의 '천황' 이치조, 그의 비 '중궁' 쇼시도 이 작품을 관심을 가지고 재미있게 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상황마다 주인공 히카루 겐지가 여색을 밝히는 바람둥이여도 무난하도록 설정된다. 가령 가리쓰보 제(帝)는 사람들의 시기, 모함을 피하게 해주려고 황자 겐지에게 근위 중장의 벼슬을 주어 신하로 삼는다. 기리쓰보 제는 수많은 후궁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신분이 낮은 기리쓰보 갱의에게 사랑을 쏟는다. 갱의는 황자를 낳지만 천황의 그 특별한 총애 때문에 질투와 빈축 속에서 병들어 죽는다.제는 황자를 애지중지할 수밖에 없고, 황자는 절세의 .. 2024. 9. 3.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 내가 잘할 수 있는 건 뭘까?잡초 뽑기?청소?손빨래?라면 끓여 먹기?책 읽기?칫솔, 속옷, 작업복 같은 것을 제외한 내 물건 특히 옷가지 구입하지 않기?외로워도 그냥 있기? 이렇게 써놓고 보니까 난 참 허접하네.그래도 이 정도로 허접할 줄은 몰랐는데...사람이 참 별 수 없네.더 있긴 하지. 가령 남 비난하기. 남(가령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의 잘잘못을 따져서 이야기하기 등등. 그런 것들은 더 잘해서 나에게나 남에게나 덕 될 건 아니지. 그러고 보면 더 있을 것도 없네.그럼 그중에서 내가 정말 잘하는 건 뭘까?잘할수록 좋은 건 뭘까?잡초 뽑긴 분명 중도 탈락이 되겠지?청소? 그걸 그렇게 잘할 필요가 있나? 미루지나 말고 하면 그만이겠지? '청소 선수'가 되었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나?빨래도 해내면 그.. 2024. 9. 1.
예전의 그 학교가 아니라는 J 선생님께 J 선생님! 오늘은 좀 섭섭한 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은 대체로 두 가지 안부를 전합니다. 우선 그저 그렇게 지낸다는 분이 대부분입니다. 회피하는 대답인가 싶어서 구체적으로 물으면 “학교야 늘 그렇지요. 변화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예상외의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진 않거든요” 하고 여유로운 관점을 보입니다. 만사는 여전(如前)하고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는데 무슨 걱정이냐는 듯합니다. 순전히 짐작이지만 그런 학교는 교장도 느긋해서 1년 내내 큰소리 한번 하지 않고 이른바 학교공동체 구성원 간에 서로 부딪칠 일도 별로 없고 교장실에 교장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의심스러울 때가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비바람이 몰아쳐도 야단스러운 꼴을 연출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건 우리가 보기에 그렇다는.. 2024. 8. 30.
자신의 죽음이 남은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게 하라고? 소노 아야코는 나이 들고 죽는 것에 대해 요모조모 구체적인 생각을 써서 《계로록(戒老錄)》(1972)이라는 책을 내었는데 123가지의 부탁 중 맨 마지막의 것은 "자신의 죽음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도록 노력한다"는 것.죽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만날 수가 없고, 어떠한 이야기도 실제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당장 내게 닥쳤다고 하면 온갖 일들이 다 그렇겠지만 이 부탁은 생각만 해도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돈, 지위, 이름 등을 남기라는 것이 아니다. 온 힘을 다해 열심히 살다가 죽었다는 실감을 자식들에게 심어주라는 것이다.종종 '어차피 너희들은 내가 죽는 것을 바라고 있을 테니까'라는 식의 비위를 긁는 말을 하는 노인들이 있으나 이러한 말은 인간의 심리를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 2024. 8. 27.
세이 쇼나곤의 글 무라사키 시키부의 일기는 관심이 없지는 않은 여학생의 일기가 우연히 눈에 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거기에 비해 세이 쇼나곤은 에세이스트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두 여방의 글을 읽은 느낌을 이야기하라면 그렇더라는 의미다.  가녀린 풀꽃─ 풀꽃은 패랭이꽃이 당나라의 것은 물론이고 일본 것도 멋있다. 여랑화, 도라지꽃, 나팔꽃, 솔새, 국화, 콩제비꽃.용담은 가지가 엉키기는 했지만 다른 꽃들이 다 서리를 맞아서 말라버렸을 때 매우 화려한 색깔로 꽃을 피우는 것이 풍취 있다.또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가마쓰카 꽃이 가련하고 예쁘다. 이름이 별로이기는 해도 한자로 쓸 때 기러기가 찾아오는 꽃(雁來鴻)이라고 하니까 그 나름대로 멋이 느껴진다.동자꽃. 색깔이 그렇게 짙지 않으나 모양이 등꽃과 비슷하고, 봄과 가을에 .. 2024. 8. 25.
내 친구의 백혈병 내 친구 J가 혈액암에 걸렸다. 백혈병이라는데 암이란 몸 어디에 악성종양이 생기는 것이라면 피에 무슨 종양이 생기나? 인터넷에 들어가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 골수 같은 혈액세포를 만들어내는 장기나 면역기능을 수행하는 세포를 만들어내는 장기에서 발생하는 암. 백혈병(leukemia), 림프종(lymphoma), 다발골수종(mulitiple myeloma) 등이 있다.· 골수와 같은 조혈 조직에서 발생한 암으로, 비정상적인 미성숙 백혈구(백혈병 세포)가 과도하게 증식하는 질환. 정상적인 백혈구와 적혈구, 혈소판의 생성은 오히려 억제된다. 정상적인 혈액세포 생성이 억제되면, 면역저하로 세균 감염이 쉽게 되고, 빈혈 증상(어지러움, 두통, 호흡곤란)이 나타나고 출혈 경향을 일으킨다. 비정상적으로 증가된 백.. 2024. 8. 23.
무라사키시키부(紫式部) 《무라사키시키부 일기(紫式部日記)》 무라사키시키부(紫式部) 《무라사키시키부 일기(紫式部日記)》정순분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11       재미있다.무라사키 시키부는 헤이안 시대 '이치조 천황'의 부인 '쇼시 중궁'을 시중든 여방(女房)이었다. 여방은 궁궐이나 귀인의 집에 기거하던 여자 관리로 단순한 시녀가 아니라 가정교사 역할까지 담당하면서 문예활동으로 가문을 빛내기도 했다. 무라사키 시키부도 쇼시 중궁에게 백낙천의 문집으로 한시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 일은 아무도 모르게 하고 있어서 중궁님조차도 그 사실을 다른 곳에 전혀 말씀하시지 않으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대감님과 주상 전하께서는 어떻게 아셨는지 중궁님을 통해 한문책을 보내와 필사를 명하곤 하셨습니다. 중궁님께서 제게 한시문을 배우고 계시다는 사실이 그 입 가벼운 여방 귀에 안.. 2024. 8. 21.
카페의 낮과 밤 강남 어느 사무실 자문역으로 나갈 때 생각한 것 하나는, 내가 만약 그런 곳에 집이 있다면 나는 하루 24시간 내내 흥분된 상태에서 지낼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그래서 전철을 타고 먼 길을 돌아와 저녁 내내 쉬면서 그 거리를 떠올리면 '이 시간에도 사람들 발길이 끊이질 않겠지. 술을 마시는 손님들이 복작거리는 가게도 있겠지.' 싶은 것이었고, 이렇게 돌아와서 저녁 몇 시간을 쉬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는 느낌이 들곤 했었다.그렇지? 이 나이에 그 긴 저녁 시간을 집에 들어와 쉬지 않고 뭘 그리 떠들어대고 있겠는가.       그 느낌은 강남 같은 곳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된 지금도 여전하다. 시대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서 혹 이젠 강남 거리들도 저녁만 되면 여기처럼 조용한 거리로 변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 2024. 8. 19.
안미린 「희소 미래 1」 「희소 미래 2」 희소 미래      1  유사 지구입니다 희소 생물입니다 심우주에서 온크리처입니다 수없는 목소리가 들려올 때 누구였을까 우리의 집에 행성이 충돌하는 일은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희고 부드럽게맑은 우주를 흘러 다닐 뿐입니다 웃고 있을까 어젯밤 무인 우주선에눈과 입을 그려준 사람   희소 미래      2  너희는 희소 생물에게 이름을 불러준다 먼 외계에게작고 투명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복슬 눈사람 인형에게눈의 기억을 들려준다 흰 청력의눈사람 언어를 영영 알 수 없지만 너희는 눈 내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아무도 밟지 않는 눈길에미래를 주저하고 첫 발자국을 거둔다 흰 눈이 지켜지는 동안 이곳은 흰 심장과 하얀 폐를 숨긴 환한 행성이었다   ..................................... 2024. 8. 18.
이 또한 그리워질 '무인 로봇 카페' 진짜  24시간 열려 있다. 그렇지만 아름다운 여인이 기다리던 그런 날들을 떠올린다면 실망스럽고 허탈해진다.주로 재즈 아니면 재즈풍 가요가 그 24시간을 채워주는 것 말고 다른 걸 기대해서는 안 된다.    주문 키오스크 앞에 서서 손가락 그림("여기를 터치하세요")을 따라가면 주문이 이루어진다. 식당에서 테이블 위 키오스크를 작동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비용을 사전에 결제해야 하는 것은 다르다. 음료의 비용은 종류에 따라 3,000원~4,000원이다. 주문이 이루어지면 저 '로봇'(화면 중앙에서 두 눈을 뜨고 고개를 쳐들고 있는 물체)이 일을 시작한다.간간히 이런 방송이 들린다(단어나 자구 하나하나가 다 정확한 건 아니다)."음료를 제조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로봇은 음료를 준비할 자리에 컵 .. 2024. 8.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