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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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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사키시키부(紫式部) 《무라사키시키부 일기(紫式部日記)》

by 답설재 2024. 8. 21.

무라사키시키부(紫式部) 《무라사키시키부 일기(紫式部日記)》

정순분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11

 

 

 

 

 

 

 

재미있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헤이안 시대 '이치조 천황'의 부인 '쇼시 중궁'을 시중든 여방(女房)이었다. 여방은 궁궐이나 귀인의 집에 기거하던 여자 관리로 단순한 시녀가 아니라 가정교사 역할까지 담당하면서 문예활동으로 가문을 빛내기도 했다. 무라사키 시키부도 쇼시 중궁에게 백낙천의 문집으로 한시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 일은 아무도 모르게 하고 있어서 중궁님조차도 그 사실을 다른 곳에 전혀 말씀하시지 않으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대감님과 주상 전하께서는 어떻게 아셨는지 중궁님을 통해 한문책을 보내와 필사를 명하곤 하셨습니다. 중궁님께서 제게 한시문을 배우고 계시다는 사실이 그 입 가벼운 여방 귀에 안 들어가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내성적이고 조용한 것을 좋아한 여방이었다.

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쓰치미카도 저택의 가을─1008년 7월 19일).

 

어느덧 완연해진 가을빛 속에 이곳 쓰치미카도 저택은 매우 운치가 있다. 연못가 나무 끝이나 도랑가 풀들이 곱게 물들어 있고, 하늘빛 또한 부드럽고 그윽하기 그지없다. 그 속에서 나지막이 울리는 스님들의 부단 독경 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청아해서 가슴에 와 닿는다. 아마도 저녁부터 저택을 휘돌아 부는 바람 소리, 졸졸졸 흐르는 도랑물 소리와 함께 이 밤이 다 가도록 들려올 것이다.

중궁님께서는 몸도 무겁고 해서 여러모로 힘드실 텐데 내색 한번 하시는 일 없이 여방들 얘기를 들으시며 차분히 시간을 보내고 계신다. 정말이지 우리와는 전혀 다른 대단하신 분이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는데, 사실 중궁님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도 매우 황공스러운 일이다. 나같이 하찮은 사람은 중궁님을 옆에서 모시는 것만으로도 가슴속에 쌓였던 고뇌가 사라지고 이 우울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기의 곳곳에 우울하고 고독한 심정을 나타내었다(사가에서의 우울한 마음11월 15일 전후).

 

앞뜰 연못에 무리 지어 헤엄치는 물새가 점점 많아지는 것을 보면서 중궁님께서 궁궐로 돌아가시기 전에 어서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 연못에 눈이 내리면 얼마나 근사할까 하고 이제나저제나 눈을 기다리는 사이 잠깐 사가에 다녀올 일이 생겼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눈이 내리다니. 볼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사가에서 눈 내린 풍경을 보고 있자니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만 더 심란해졌다. 사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몇 년 동안은 상심한 나머지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지냈다. (...)

 

무라사키 시키부는 출산 중 사망한 데이시 전 중궁의 여방 세이 쇼나곤(《베갯머리 서책(마쿠라노소시 枕草子)》의 저자)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꼈다. 일기에는 이런 부분도 보였다.

 

세이쇼나곤은 잘났다고 으스대며 자기가 제일이라고 뻐기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잘난 척하며 여기저기에 써놓은 한문 글귀를 보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든 남보다 더 뛰어나 보이려고 애쓰고 과장해서 행동하는 사람은 나중에는 오히려 남보다 뒤떨어져 초라한 말년을 보내기 일쑤지요. (...)

 

함께 근무하지도 않은 사이임에도 이처럼 강렬했던 라이벌 의식은 긍정적으로 작용했는지 부정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지난번에 이 블로그에 세이 쇼나곤의 일기를 옮겨 썼을 때 불친 淸님이 보시고 마침 시청하고 있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세이 쇼나곤과 무라사키 시키부의 껄끄러운 관계를 소개해서 '세이 쇼나곤을 비판한 여방? 누구지?' 하고 이 일기를 읽게 되었는데 현대 문학사에서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최초의 작품이라는 《겐지 이야기》의 저자라고 해 또 놀라웠다.

 

세이 쇼나곤의 일기(《베갯머리 서책(枕草子)》와 무라카미 시키부의 이 일기 중 한 권만 더 읽으라면 나는 아무래도 세이 쇼나곤의 일기를 다시 읽을 것 같다.

그렇지만 내가 당시 궁궐을 드나들던 관리였다면 두 여성 중 어느 쪽을 기웃거렸을까? 그 경우에는 아무래도 무라카미 시키부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