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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 《노예의 길》

by 답설재 2024. 8. 8.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 《노예의 길》

김이석 옮김, 나남 2006

 

 

 

 

 

 

 

책 제목을 들었을 땐 흑인노예가 생각났었다. 책을 찾아 들고서 비로소 제목 바로 아래의 부제 '사회주의 계획 경제의 진실'을 발견했다.

오래전《소유냐 존재냐》(에리히 프롬)라는 책의 첫머리를 보고 '어떻게 이런 문장이 있을 수 있나!' 감탄했던 것처럼 이 책의 결론 부분을 보고 '하이에크는 이 문장을 몇 번이나 윤문(潤文)했을까?' 생각했다.

그 결론의 뒷부분을 옮겨 썼다.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만들어졌던 우리의 길을 막았던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개인들을 '지도'하고 '명령'하기 위한 또 다른 기구를 고안하기보다는 개인의 창의적 에너지를 분출하도록 놓아두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고자 한다면, 이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더 큰 도약을 위한 후퇴(reculer pur mieux sauter)를 의미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역사적 경향의 불가피성을 신봉하는 사람들, 과거 40년간의 경향을 미래로 확장한 데 불과한 '신질서'(New Order)를 설교하는 사람들, 히틀러를 모방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없는 사람들로부터는 이런 용기를 기대할 수 없다. 신질서를 가장 소리높이 외치는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이 전쟁을 발발시키고, 우리가 겪고 있는 악덕(evils) 들을 발생시킨 사상에 가장 철저하게 물든 사람들이다. 젊은 세대가 나이 많은 세대 대부분을 지배하는 사상에 대해 별 신뢰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면 그들이 옳다. 그러나 연장자들을 지배하는 사상이 여전히 19세기 자유주의라고 믿고 있다면 그들이 틀렸다. 그들은 오도된 것이다. 사실 젊은 세대들은 19세기 자유주의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다. 19세기의 현실로 돌아가기를 바라지도 않거니와 또 그런 힘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그 이상들을 실현시킬 기회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이상들은 결코 천박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할아버지들보다 이 사실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일을 엉망으로 만든 것은 19세기의 할아버지들이 아니라 20세기의 우리라는 점이다. 만약 자유로운 사람들의 세상을 창출하려는 첫 번째 시도에서 실패했다면, 우리는 다시 시도해야 한다. 실로 개인의 자유를 위한 정책이 유일한 진보적 정책이라는 핵심적 원리는 19세기에 진리였듯이 현재에도 여전히 진리이다.

 

 

역자 서문에서 이 책의 성격이 될 만한 부분을 옮겨보았다.

 

 

아마 이 책처럼 사상의 물줄기를 돌려세우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 책은 드물 것이다. 영국병을 치유한 마거릿 대처, 전후 독일에서 자유시장경제로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에르하르트나 미국의 미국 레이건의 개혁, 공산권 붕괴 이후 재건 중인 동구의 민영화정책 등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하이에크의 이 책과 만나게 된다. 헨리 해즐릿(Henry Hazlitt)은 이 책을 20세기에 쓰인 가장 위대한 책 가운데 하나라고 평하였으며, 하이에크와 (화폐) 논쟁을 벌였던 케인스(Keynes)도 의견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내용에 가슴 깊이 동의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한국어판도 1954년에 청구출판사에서 《노예의 길》(이정환 역)이 처음 나왔으며, 그 후 1959년에 동일 역자에 의한 번역본이 일조각에서 다시 출판되었다. 그 후 1973년에는 삼성문화문고에서 《예종의 길》(정도영 역, 상·하)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며, 1999년 자유기업원에서 동국대 출판부에서 출판된 것(1993년, 김영청 역)을 《노예의 길》이란 제목으로 재출간하였다.

 

 

나의 '불벗' 정바름 님께 이렇게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