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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김동식 《악마대학교 이야기》

by 답설재 2024. 9. 7.

김동식(중편소설) 《악마대학교 이야기》

『현대문학』 2024년 9월호

 

 

 

 

 

 

악마대학교 이야기

 

 

김동식

 

 

악마는 두꺼운 전공 서적 여럿을 품에 안고 다급히 이동했다. 어찌나 급한지 중간중간 짧은 순간이동까지 섞어가며 겨우 도착한 그곳, '악마대학교'의 한 강의실이다. 뒷문을 열고 들어서자, 학구열에 불타는(의미 그대로 진짜 불타기도 하는) 악마들이 한가득 앉아 있다. 늦게 온 이 악마 또한 그곳에 섞여 들어가 무거운 서적을 내려놓았다. 교수 악마는 그를 힐끔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가 하던 강의를 계속했다.

"자, 그러면 다음 발표자. 어떤 수법을 준비해 왔지?"

긴장한 악마 하나가 벌떡 일어나 강당 앞으로 순간이동을 하다가 '악'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우스꽝스러울 수 있는 광경이지만 다들 웃지 못했다. 그만큼 오늘은 중요한 날이었다. '악마의 기술 발표' 사전 점검. 이 악마대학교의 존재 이유라고 봐도 무방할, '어떻게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 것인가?'에 관해 발표하는 '6월의 발표 날'이 불과 며칠 뒤였다. 악마대학교에서 최고로 중요한 그날에는 외부 고위층 인사들이 대거 참관했고, 즉석에서 학생들을 스카웃해 가기도 했다. 그래서 학생들은 졸업식보다 6월의 발표 날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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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대학교'의 목적은 인간들이 파멸의 길을 걷게 할 수 있는 수법을 연마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사랑, 돈, 영생(永生)의 세 가지 주제를 두고 인간들이 기꺼이 탐욕에 빠져 파멸하는 사례를 시물레이션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악마 아블로의 확신에 찬 수법은 사랑에 대한 욕망이다. 혜진을 짝사랑하는 성국으로 하여금 자신의 목숨을 야금야금 악마에게 팔아먹는데, 마침내 성국은 매일같이 유흥 생활을 즐기고, 몇 달 만에 50명도 훌쩍 넘는 여자와 잠자리를 가진 남자가 되어버린다.

악마 비델의 자신만만한 수법은 인간의 돈에 대한 욕망이다. 평범한 회사원 도준이 홀수에 거는 도박 마틴게일 베팅으로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도 거침없이 기뻐하는 인간이 되고 마침내 자신의 할머니 목숨까지 써먹으려고 한다.

악마 벨은 진시황을 속인 악마의 후손답게 영생의 비법을 활용한다. 기업가 두석규가 청년 김남우에게 장기를 기증하고 자신이 김남우의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쌓은 부(富)를 영원히 즐기려는 욕망을 보여준다. 벨은 지옥에서 가장 큰 대기업의 최고 경영자까지 참석한 '6월의 발표 날'에는 '시간 역재생기'로써 영생을 바라는 인간들을 끊임없이 과거로 보내버림으로써 영혼의 안식조차 없는 상태로 파멸시켜 버린다는 발표를 해서 최고의 수법이라는 영예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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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매장에 진열된 상품처럼 선택해서 읽을 때, 이 작품처럼 시작되는 소설을 읽지 않고 넘어가기는 어렵다. 또 시작 부분의 긴장감, 흥미로움을 끝까지 갖고 가면 한 줄 한 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 소설에는 아쉬움이 있다(김동식 작가가 악마가 아니어서 아쉽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악마들이 이 정도의 수법을 써도록 꾸며서 인간사회의 진짜 악마들 마음을 흔들어볼까 했다면 오산이라는 것이다. 김동식 작가는 아무래도 아직 인간의 악마성을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고, 더구나 작가 자신이 악마가 아니어서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다행이라면 이 정도로도 '악마대학교'가 있다는 사실은 잘 전달될 것 같다는 점이다.

 

인간사회가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악마들의 세계와 다른 점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