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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이 또한 그리워질 '무인 로봇 카페'

by 답설재 2024. 8. 16.

 



진짜  24시간 열려 있다. 그렇지만 아름다운 여인이 기다리던 그런 날들을 떠올린다면 실망스럽고 허탈해진다.
주로 재즈 아니면 재즈풍 가요가 그 24시간을 채워주는 것 말고 다른 걸 기대해서는 안 된다.

 

 

"내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주문 키오스크 앞에 서서 손가락 그림("여기를 터치하세요")을 따라가면 주문이 이루어진다. 식당에서 테이블 위 키오스크를 작동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비용을 사전에 결제해야 하는 것은 다르다. 음료의 비용은 종류에 따라 3,000원~4,000원이다.

 

주문이 이루어지면 저 '로봇'(화면 중앙에서 두 눈을 뜨고 고개를 쳐들고 있는 물체)이 일을 시작한다.

간간히 이런 방송이 들린다(단어나 자구 하나하나가 다 정확한 건 아니다).

"음료를 제조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로봇은 음료를 준비할 자리에 컵 하나를 갖다 놓고 얼른 돌아서서 이쪽을 관찰하다가 다시 돌아서서 컵을 다른 칸으로 옮긴다. 무료함을 느낀 내가 만약 좀 특이한 짓을 하면 로봇은 '참 기이한 존재를 다 보겠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기도 한다.

로봇은 음료가 준비된 컵을 화면 하단에 보이는 여러 개의 박스 중 한 곳으로 옮겨놓는다.

"셔터가 완전히 열리면 컵을 꺼내주세요."

 

그런 안내가 들려도 음료가 담긴 컵을 마음대로 꺼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는 화면 하단 왼쪽이나 오른쪽의 키보드에 키오스크가 찍어준 네 자리의 숫자(주문번호)를  입력해야 한다. 아름다운 여인이 "음료 나왔습니다~" 해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시럽 음료는 잘 저어 드시면 더욱 맛있습니다."

그런 충고가 들리면 재미는 없었지만 이제 저 로봇이 해주는 일도 끝난 것이다. 기대할 건, 겉치레 인사 한 마디뿐이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그놈의 '좋은 하루'는 그나마 아침에는 그럴듯하게 들리는데 오밤중에는 '누굴 놀리나?' 싶을 뿐이다.

 

"나도 한 잔 시킬까요?" 묻는 여인도 없고, 그래서 따스하고 자그마한 손을 잡아볼 일도 없고, 어린애가 칭얼대듯 직접 좀 저어달라고 객쩍은 부탁을 할 수도 없다. 그러니까 이 로봇 하고는 정분이 날 수가 없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일까, 우리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일까?

내가 S시 교육청에서 파견근무를 하던 해의 어느 날 아침, 장학사 하나가 빙그레 웃으며 "답설재 선생, 어제 오후에 요 아래 다방에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면서?" 물었고, 나는 그게 뭐 어떻다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는 일이었는데, 그건 다방에 드나들며 정분이 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나도 저절로 알게 되었다. 그 옛날과 저 로봇이 보여주는 날들은 어느 쪽이 더 나은 것일까...

 

잊은 것이 있다. '1인 1 메뉴'의 원칙에 따라 음료 한 잔을 주문한 사람은 2시간 동안 앉아 있을 수 있다. 다 자율적인 건 물론이지만 저 로봇이 지켜보는 느낌이고 눈길을 돌려보면 어디엔가 CCTV 카메라가 있다. 누군가 어디서 '저놈 봐라?' 하며 바라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고, 나는 매번 자세를 고친다.

 

 

덧붙임 ① 창문에 붙은 Non Coffee Menu, 저건 거의 맨날 거짓말이다. ② 이 여름, 나는 저 무인카페를 여러 번 드나들었다. 이 나이에 이렇게 지내게 될 줄이야...... 사람의 일은 정말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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