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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내가 만난 여인들

by 답설재 2024. 8. 14.

 




그 옷가게 키 크고 조용한 여주인은 내가 엷은 청회색 줄무늬 상의를 입자 미소를 지었다.
잠깐 너무 쉽게 정했나 싶었지만 그대로 입고 나왔다.

교원들이 여러 룸으로 나뉘어 세미나를 개최하는 곳이었다.
내가 꼭 참석해야 하는 모임은 아니었지만 어느 룸 맨 뒷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잠시 후 도착한 강사는 말수가 적고 정숙하던 여교사였는데 그때보다 훨씬 아름다워 보였다. 나를 발견하고 조용히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가 두어 교사의 도움을 받으며 발표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교재만 가지고 그곳을 나왔다.
아주 두꺼운 책은 아니어도 이제 손에 든 책이 여덟 권이나 되었다.

일부러 좀 후진 곳을 문화의 거리라고 부르기로 했을까? 파도가 심하면 문앞까지 바다일 듯한 '문화의 거리' 한 허름한 여인숙에서 쉬다 나왔는데 이런! 책을 두고 나왔고 길조차 잃었다.
속이 상하기 시작했는데(나는 너무 자주 길을 잃고 속을 끓인다) 하얀 정장의 젊은 여인이 다가왔다. 그 거리를 잘 안다고 했고 일방적으로 뭘 자꾸 지껄여서 결혼을 했느냐고 묻자 무례하다고는 않고 '물론 못했다'며 억울하다고 했다. (억울하기는 뭐가 억울해!)
도대체 여기가 어딜까... 두리번거리다가 여자를 따돌렸고 곧 그 여인숙을 발견했다.
여인숙 주인은 사람들 말로는 할머니지만 아직은 고운 여자였다. 미소를 지으며 책을 내주었다.
그 순간 나는 이렇게 헤맬 것이 아니라 택시를 부르자고 마음먹었다.

무더운데 아프기까지 한 하루하루가 이어지는 이 여름의 어젯밤(8월 11일 일요일), 꿈이었다.
나는 기이하게도 여러 여자를 만났고 조용히 대했고 그렇게 헤어졌다. 잠깐, 삶을 이렇게 살아올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해보았다. 그렇지만 흰옷 입은 그 여인을 따라갔다면 큰일날 뻔했지?

아파트 앞 무인 카페에서 이 꿈을 되살려 썼다.
다 쓰고 나니까 조용필의 '꿈'을 리메이크한 한 여가수의 노래가 흐르는 중이었다.
조용필은 두고두고 참 그럴듯한 가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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