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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제국주의의 짐, 범죄의 백과사전·선행의 백과사전

by 답설재 2024. 5. 14.

출처 : Google

 

 

 

현직에 있을 때는, 자신의 견해가 아니면 다 '매국노'라는 식으로 매도하는 고집스러운 역사학자들을 여러 명 봤다. 장관과의 조찬 모임에서 교육과정을 개정해서 역사 가르치는 시간이 줄어들게 한 사람들을 '매국노'라고 하는 사람도 만났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고, 그 말을 들으며 아침을 먹는 나는 장관이 뭐라고 답하는지 살피며 매우 슬펐다. 학창 시절에는 그런 사람들이 만든 교과서로 역사를 배웠다.

'이 사람들은 왜 이럴까?'

뭔가 미심쩍어하면서도 다 우리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너무나 깊어서 그럴 것이라고 애써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혹 다른 견해로 쓴 책을 보면 '조금 별난 역사학자' 정도로 받아들이곤 했다.

그건 세계사에 대해서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으며 내 눈은 '완전'(!) 뒤집혔다. 그게 아니었네! 내 눈은 너~무 늦게 뒤집힌 것이다.

나는 이제 콩으로 메주를 쑤는 것 아니냐고 물어도 정말 그런지 모르겠다,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우리 역사나 세계사를 가르쳐주신, 가령 고등학교 때의 황영목 선생님 같은 분에 대한 유감은 전혀(!) 없다. 그건 내가 만든 교과서, 내가 관리한 수많은 교과서로 가르쳐주신 전국 방방곡곡 선생님들에 대한 정서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 선생님들을 원망하는 건 나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다만 그렇게 '고집'을 부려서 나처럼 눈이 '완전' 뒤집힌 사람을 만들어낸 역사학자들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유발 하라리로부터 배운, 그렇지만 아무래도 소략한 '제국'에 대한 부분을 옮겨보았다.

 

 

(...) 축적된 새로운 지식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피지배 민족을 이롭게 하고 이들에게 '진보'의 혜택을 가져다줄 수 있었다. 의료와 교육을 제공하고, 철로와 운하를 건설하며, 정의와 번영을 보장할 수 있었다. 제국주의자들은 자신의 제국이 거대한 착취 사업이 아니라 비유럽 인종을 위해 시행된 이타적 프로젝트라고 주장했다.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은 이를 '백인의 짐 White Man's burden'이라고 표현했다. "백인의 짐을 받아들여라./ 너희가 낳은 가장 뛰어난 자식들을 보내라./ 이들에게 유배생활의 의무를 지워라./ 너희가 정복한 사람들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온갖 장비를 무겁게 걸치고, 몸을 떠는 종족과 야만의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반은 악마이고 반은 어린이인/ 침울한 사람들을 위해."

물론 이런 신화가 거짓임은 종종 폭로되었다. 1764년 영국은 인도에서 가장 풍요로운 벵골 지방을 정복했다. 새 지배자들의 관심은 자신들이 부유해지는 데만 쏠려 있었다. 이들은 파멸을 초래하는 경제정책을 채택했고, 이 정책은 몇 년 지나지 않아 벵골 대기근을 낳았다. 기근은 1769년 시작되었으며 이듬해 파국적인 수준에 도달해 1773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재앙으로 벵골 주민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천만 명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

사실은 압제와 착취의 이야기도, 백인의 짐 이야기도 현실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유럽 제국들은 너무나 큰 규모로 다양하고 수많은 일들을 했기 때문에, 무슨 주장에 대해서든 그에 맞는 사례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이 제국들은 세계 곳곳에 죽음과 압제와 불의를 퍼뜨리는 사악하고 기괴한 집단이었을까? 그렇다고 믿는 사람은 이들이 저지른 범죄로 백과사전이라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제국이 사실은 새로운 의학, 더 나은 경제적 형편, 더 큰 안보를 제공해서 피지배인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했다고 주장하고 싶은가? 그런 업적으로 채워진 백과사전도 너끈히 만들 수 있을 것이다.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조현욱 옮김, 김영사 2016)

 

 

이런 글을 읽어보면 세상에 '정의'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마이클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얇지 않은 책을 쓰면서 끝까지 어정쩡한 이야기만 해놓은 이유를 알 것 같다.

더구나 '인류공영(人類共榮)이라니, 우습지 않은가.

'역사'란 모름지기 역사를 생각하는 눈을 가꾸어주는 공부라야 한다. "바로 이것이야!" 식의 설명식·주입식 역사교육은 다 허망한 것이고, "생각하는 눈 같은 건 나중에 가르쳐줄게"라는 약속은 사기(詐欺)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