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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by 답설재 2024. 5. 8.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차경아 옮김, 까치 2012

 

 

 

 

 

 

 

이 책을 2012년에 구입했다. 그전에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한 그릇된 환상의 종말

무궁한 발전에 대한 위대한 약속─자연의 지배, 물질적 풍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그리고 무제한적인 개인의 자유에 대한─은 산업시대 개막 이래로 여러 세대에 걸쳐서 희망과 믿음을 지탱해 온 토대였다. 사실상 인간의 문명은 인간이 자연을 능동적으로 지배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산업시대가 개막되기 이전까지는 그 지배력에 한계가 있었다. 인간과 동물의 노동력을 기계 에너지가, 나중에는 핵 에너지가 대신하고 인간의 두뇌를 컴퓨터가 대신하기까지 산업의 발달은 우리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우리는 무한한 생산과 아울러 소비의 도상에 있으며, 과학과 기술에 힘입어서 우리 자신이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리라는 확신 말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제2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막강한 존재, 즉 신(神)들이 되어가고 있었고, 자연이란 우리에게 새로운 창조물을 지을 벽돌이나 공급해주면 되는 것이었다.

 

 

서론 시작 부분 한 문단을 읽고 책을 덮었다.

더 읽을 수가 없었다. 문명의 발달 혹은 현대문명에 대한 이처럼 간결하고 정확한 표현이 있을 수 있다는 데 대한 놀라움 때문이기도 했고, 구체적으로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무렵의 거의 원시적이라고 해도 좋을 어린 시절의 그 생활이 순식간에 변해서 세상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도 밑지고 싶지 않을 이 나라의 수도 서울을 매일 같이 드나들며 퇴임 후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의 감회가 그때까지는 어렴풋했으나 이 한 마디로 인해서 너무나 절절한 것으로 다가오면서 이 문명에 대해 역시 '어렴풋했던 실망감'이 프롬의 저 '환상의 종말'이라는 표현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되고 있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나는 그 인식으로 인한 벅찬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 한 마디에 압도되어 그 이상의 내용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고, 단 한 마디에 점령되어버린 상태로는 더 읽어나갈 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준비가 필요했다.

내 지식 창고는 빈약해서 창고의 크기부터 넓혀야 할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나는 책을 사놓고도 어영부영 다시 12년의 시간을 보냈는데, 지난 봄 ○○ 외고에 입학한 내 불친 정바름 님(중 2 겨울방학 때 친구가 되어 준), 그 친구가 곧 이 책을 읽기로 했다고 쓴 글을 보고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이 책을 찾았다.

 

프롬은 '산업시대는 사실상 그 위대한 약속을 이행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으며, 그것은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 행복과 최대치의 만족은 모든 욕망의 무제한적인 충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복지상태(well-being)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 우리가 자기 삶을 지배하는 독자적 주인이 되리라는 꿈은 우리 모두가 관료주의 체제라는 기계의 톱니바퀴로 몰려들었음을 인식함과 더불어 깨어져버렸다.

─ 우리의 사고, 감정, 취미는 매스 미디어를 지배하는 산업 및 정부기구에 의해서 조정되고 있다.

─ 경제적 성장은 부강한 나라들에 국한된 것이었으며, 부강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져왔다.

─ 기술적 진보는 생태학적 위험과 핵전쟁의 위험을 필연적으로 수반해왔고, 그 각각의 위험 또는 두 가지 위험이 뭉뚱그려져서 모든 문명에, 어쩌면 모든 생명체에 종말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프롬이 이러한 사실을 일일이 분석하면서 '소유(所有)'는 결코 내게(개인에게) 행복의 원천이 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는 동안 나는 내내 흥미롭고 통쾌하기까지 했다.

읽기도 전에 압도되었던 일이 좀 쑥스럽기도 했다.

 

다만 사회의 변혁과 사회적 성격의 변천은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 모든 인간에게 '종교적 충동'은 사회의 변혁에 근본적으로 작용하는 에너지의 공급원이라는 것, '새로운 사회'는 인간의 근본적인 내적 변화를 통해서만 이룩되며, 현존하는 헌신의 대상 대신 새로운 헌신의 대상이 등장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대한 제안은 그렇겠다 싶으면서도 불안한 느낌을 주는 부분이 있었다.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가령 이런 제안도 보였다.

 

실제로 중요한 문제는 "종교"도 교리도 제도도 없는 휴머니즘적 종교성으로서의 개종을 이루어내는 일이다. 석가모니의 무신론적 운동으로부터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닦아놓은 그런 종교성으로서의 개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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