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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싯다르타와 만신전

by 답설재 2024. 5. 1.

출처 : 블로그 "필립스조명 DK몰"

 

 

 

책을 쓰는 사람들은 두뇌가 평범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전에는 그걸 실감하고 확인할 때마다 나도 무슨 수를 써서 나에게도 이런 면모가 있다는 걸 보여주어야지 하고 과욕을 부리기도 했는데 그게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한계를 인식하게 된 것인데, 마음을 그렇게 고쳐먹자 '와, 이런 사람은 언제 이런 걸 다 알게 된 걸까?' 하고 드러내놓고 감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똑똑한 사람도 있구나...'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을 땐 그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책의 내용들이 그의 견해를 대충 써놓은 게 아니라 완벽에 가까울 정도의 지식을 갖추어 쓴 원고일 것이라는 인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싯다르타에 대한 글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믿음을 얻기보다 싯다르타가 누군가에 대해 이 책 저 책에서 여러 번 봤지만 개요가 이런 것이라면 단 한 줄도 쓰지 못할 것 같았다.

 

 

불교의 중심인물은 신이 아니라 인간, 고타마 싯다르타다. 불교 전통에 의하면 고타마는 기원전 500년경 히말라야에 있던 작은 왕국의 후계자였다. 이 젊은 왕자는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고통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남자와 여자, 어린이와 노인 모두가 전쟁이나 전염병 같은 우연한 재난뿐 아니라 고민, 좌절, 불만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는데, 그 모두가 인간 조건의 필수적인 부분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부와 권력을 추구하고, 지식과 소유물을 얻으며, 아들딸을 낳고, 집과 왕궁을 짓는다. 하지만 무엇을 이룩해도 결코 만족할 수 없다. 가난하게 사는 사람은 부자를 꿈꾼다. 1백만을 가진 사람은 2백만을 원한다. 2백만을 가진 사람은 1천만을 원한다. 심지어 부와 명성을 가진 사람도 만족하는 일이 드물다. 이들 역시 끝없는 괴로움과 걱정에 사로잡혀 살다가 결국 늙고 병들어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 사람이 쌓은 모든 것은 연기처럼 사라진다. 삶은 극심하고 무의미한 생존경쟁이다. 어떻게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타마는 29세에 가족과 재산을 뒤로하고 한밤중에 왕궁을 빠져나왔다. 그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으며 집 없는 방랑자로 인도 북부를 구석구석 떠돌았다. 그는 아시람(힌두교 수행자)들을 방문해 구루들의 발치에 앉았지만, 아무것도 그를 완전히 해방시켜주지 못했다. 모종의 불만이 항상 남아 있었다.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완전한 해방의 길을 찾을 때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번뇌를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6년에 걸쳐 인간 번뇌의 핵심과 원인과 치유법에 대해 명상을 했고, 마침내 그 번뇌의 원인은 불운이나 사회적 불공정, 신의 변덕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번뇌는 사람의 마음이 행동하는 패턴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고타마는 다음과 같이 통찰했다. 마음은 무엇을 경험하든 대개 집착으로 반응하고 집착은 항상 불만을 낳는다. 마음은 뭔가 불쾌한 것을 겪으면 그것을 제거하려고 집착하고, 뭔가 즐거운 것을 경험하면 그 즐거움을 지속하고 배가하려고 집착한다. 그러므로 마음은 늘 불만스럽고 평안에 들지 못한다. 이 사실은 우리가 고통 같은 불쾌한 경험을 할 때 매우 분명해진다. 고통이 지속되는 한 우리는 불만스럽고, 고통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즐거운 일을 경험해도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즐거움이 사라질까 봐 두려워하거나 더 커지기를 희망한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찾기를 몇 년씩 꿈꾸지만, 실제로 찾았을 때 만족하는 일은 거의 없다. 상대가 떠날까 봐 전전긍긍하는가 하면 좀 더 나은 사람을 찾을 수 있었는데 너무 값싸게 안주했다고 느낀다. 심지어 용케 둘 다를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리라.

 

위대한 신들은 우리에게 비를 보낼 수 있고, 사회제도는 정의와 좋은 의료를 제공할 수 있으며, 우연한 행운은 우리를 백만장자로 만들어줄 수 있다. 하지만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우리의 기본적 정신 패턴을 바꾸지는 못한다. 가장 위대한 왕이라 할지라도 슬픔과 번민으로부터 끊임없이 달아나며 더 영원히 큰 즐거움을 뒤쫓는 번뇌 속에 살 운명이다.

 

고타마는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만일 즐거운 일이나 불쾌한 일을 경험했을 때 마음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거기에는 고통이 없다. 당신이 슬픔을 경험하되 그것이 사라지기를 원하는 집착을 품지 않는다면, 당신은 계속 슬픔을 느끼겠지만, 그로부터 고통을 당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슬픔 속에 풍요로움이 있을 수 있다. 당신이 기쁨을 느끼되 그것이 계속 유지되며 더 커지기를 집착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고 계속 기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모든 것을 집착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고타마는 집착 없이 실체를 있는 그대로 느끼게끔 훈련하는 일련의 명상기법을 개발했다. 이 방법은 우리 마음이 "지금과 다른 어떤 경험을 하고 싶은가?"보다 "지금 나는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온 관심을 쏟도록 훈련시킨다. 이 같은 마음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고타마는 이런 명상기법을 일련의 윤리적 규칙들 위에 구축했는데, 그 규칙들은 우리가 집착이나 환상에 빠지지 않으면서 실제 경험에 초점을 맞추기 쉽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살생, 음행, 도둑질을 피하라고 했는데, 이런 행동은 반드시 집착(권력과 감각의 기쁨, 그리고 부에 대한)의 불을 지피기 때문이다. 불이 완전히 꺼지면 집착은 완벽한 만족과 평온의 상태와 자리를 바꾸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열반이다(열반은 문자 그대로 '불 끄기'란 뜻이다). 열반에 이른 사람은 모든 고통에서 해방된다. 이들은 실재를 극도로 분명하게 경험하며, 환상이나 망상에서 자유롭다. 이들도 분명 불쾌함이나 고통에 맞닥뜨릴 테지만, 그런 경험은 이제 아무런 정신적 고통을 일으키지 않는다. 집착이 없는 사람은 고통받지 않는다.

 

불교 전통에 따르면 고타마는 그 자신이 열반에 들었으며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를 얻었다. 그는 '부처'로 알려졌다.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 부처는 모든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여생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발견을 전하는 데 바쳤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한 가지 법칙으로 요약했다. 번뇌는 집착에서 일어난다는 것,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데 있다는 것,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실재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도록 마음을 훈련시키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법(Dharma, 다르마)으로 알려진 이 법칙은 불교도에게 보편적 자연법칙으로 이해되고 있다. '고통은 집착에서 생긴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진리다. 현대 물리학에서 E가 늘 mc2과 같은 것과 마찬가지다. 불교도는 이 법칙을 믿고 모든 행동의 지주로 삼는 사람들이다. 한편 신에 대한 믿음은 이들에게 그리 중요치 않다. 일신론적 종교의 제일 원리는 "신은 존재한다. 그분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인 반면 불교의 제일 원리는 "번뇌는 존재한다. 나는 거기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이다.

 

불교는 신들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는다. 신들을 비와 승리를 가져다줄 수 있는 강력한 존재로 묘사한다. 하지만 이 신들은 집착에서 고통이 일어난다는 법칙에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모든 집착에서 해방되었다면, 어떤 신도 그를 불행하게 만들지 못한다. 반대로 일단 어떤 사람의 마음에서 집착이 일어나면, 우주의 어떤 신도 그를 번뇌에서 구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일신교적 종교와 아주 비슷하게, 불교 같은 근대 이전의 자연법칙 종교 역시 신에 대한 숭배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불교는 사람들에게 경제적 풍요나 정치권력 따위가 아니라 번뇌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라는 궁극의 목표를 지향해야 한다고 가르쳤지만 불교도의 99퍼센트는 열반에 도달하지 못했고, 설령 언젠가 내세에서 열반을 이루기를 원했다 할지라도 현세의 삶 대부분은 세속적 성취를 추구하는 데 바쳤다. 그래서 이들은 인도의 힌두신, 티베트의 본교(苯敎)의 신, 일본의 신도(神道)의 신을 비롯한 다양한 신들을 계속 섬겼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불교 분파들이 부처들과 보살들로 구성된 만신전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해탈할 능력을 지닌 인간(보살)과 비인간적 존재(부처)이지만 연민 때문에 해방을 포기했다고 했다. 아직도 불행의 덫에 빠져 있는 무수한 존재들을 돕기 위해서 말이다. 신을 숭배하는 대신에 많은 불교도들은 이런 깨달은 자들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열반에 이르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할 뿐 아니라 세속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빌었다. 그래서 우리는 동아시아 곳곳에서 수많은 부처와 보살이 비를 부르고, 전염병을 막고, 심지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이기는 데 시간을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기도와 색색의 꽃과 향과 쌀과 사탕을 받는 대가로 말이다.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조현욱 옮김, 김영사, 2016)의 '인류의 통합'에서 옮겨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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