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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교육

바꾼다고? 싫어! 좋은 거라도 싫어!

by 답설재 2024. 5. 20.


 
 
나는 교사 시절부터 교과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교육부에 들어가 일할 때에는 그 관심을 증폭되어 몸이 다 망가지도록 일했다.
그렇게 해서 지병을 갖게 되었고, 퇴임은 내겐 그 고초의 시작이 되었고, 심할 때는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구나' 싶었다. 오늘 낮에도 문득 옛일을 떠올리다가 '아, 그건 우리나라 역사상 내가 처음 도입한 거지'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런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 모든 걸 생각하기도 싫어졌다.

 

무슨 일이든 하던 대로 하면 저항이 없다. 작은 일이라도 바꾸자고 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부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귀찮고, 잘못되면 책임 때문에 걱정스럽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꾸려면 웬만한 일은 아예 지시하듯 해버려야 하고 저질러 놓고 보자는 식으로 추진해야 한다.
의견을 다 듣고 결정해야 하는 일도 물론 있다. 그런 건 연결되어 있는 업무가 있고 예산이 많이 들거나 그 영향이 큰 경우이다.

 

이런 것들은 지금 이 컴퓨터 앞에서 생각하는 것들이다.
혁신에 대한 알랭 드 보통의 생각을 그의 책을 읽다가 옮겨놓았다(《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나의 경험들이 떠오른다. 그렇지만 다 옛날 얘기이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기술에서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이는 반면에, 사회적 관습의 경우에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집착하고 깊이 몰두한다. 우리는 교육, 인간관계, 여가, 축하, 태도 등을 다루는 전통적인 방식에 의해서 확신을 얻는다. 우리는 오직 한 사람의 생각에만 근거하여 시작된 혁신에 대해서 특히 저항감을 가지게 된다. 어떤 생각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가장 커지려면, 그 생각이 단순히 어떤 개인이 제기한 혁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상식이나 공통의 지혜의 산물처럼 보여야 할 필요가 있다. 가령 소프트웨어 분야에서의 대담한 혁신으로 간주되는 것조차도, 사회적 영역에서는 마치 개인숭배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다른 건 알아도 얘기할 입장도 아니고 얘기하고 싶지도 않다. 교육에 대해서는 얘기하고 싶은 게 많다. 나는 교과서에 대한 정부 정책에 지금도 불만이 많다. 내가 한동안 그 일을 직접적으로 담당했지만 내 마음대로 한 건 별로 없었다. 중요한 정책에 대해서는 윗사람들의 생각이 완고해서 요지부동이었고,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사항들에 대해서는 이번에는 형식상으로는 내 지휘를 따르는 직원들이 어정쩡한 태도를 갖고 있거나 이해력이나 창의력이 미흡해서 지지부진했다. 물론 바꾼 건 많지만 그렇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아서 다 잊고 싶은 지금도 생각만 하면 분통이 터진다.

거국적인 일로는 내가 교육부에서 일할 때의 어느 대통령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대통령은 학력(學力이 아니라 學歷)은 별로 높지 않은데도 내가 보기에 교육에 대해서는 역대 어느 대통령도 그만큼의 이해를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가 제안(지시가 아니라 제안)하는 것들마다 내 마음은 기대와 희망 같은 것으로 요동을 쳤는데 어느 것 한 가지도 속시원히 받아들여진 적이 없었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사람들은 현재의 정책을 고수하고 싶어 하고 흔들리지 않으려고 갖은 핑계를 다 댄다. 대통령이 일일이 다 간섭할 수가 없으므로 하는 척 시늉만 낸 일도 있었다.

그 대통령이 교육부 업무보고 때 한 말을 녹음한 테이프를 어느 사무관에게 부탁해서 하나 갖고 있었는데 "이게 그 테이프!"라고 내 집에 오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자랑을 늘어놓다가 어느 날 찾으니까 사라지고 없었고, 나는 내 입이 방정이라고 지금도 후회하고 있지만 이제 그럴 일도 없으니 할 말도 없다.

이런 얘기는 정말 꺼내기도 싫은데 얼마 전에 에리히 프롬의 책(《소유냐 존재냐》)를 읽다가 또 그런 얘기가 눈에 띄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 글을 쓰고 있다. 에리히 프롬의 생각은 특별한 것도 아니고 평범한 것이지만 그만큼 사실이어서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옳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거나 뒷걸음치는 태도, 요컨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의존하는 태도는 우리에게 상당히 큰 유혹이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며, 그것에 매달릴 수 있다. 우리는 미지의 것, 불확실한 것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데에 불안을 느끼며, 그래서 그렇게 하기를 피한다. 그 발걸음은 일단 내딛고 난 다음에는 위험스럽게 보이지 않을는지 몰라도, 그러기 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위험스럽고 겁나 보인다. 옛것, 이미 겪어본 것만이 안전하다. 아니, 최소한 안전한 듯하다. 새로 내딛는 발걸음은 실패의 위험을 감추고 있고, 이것이야말로 왜 사람들이 자유를 두려워하는가 하는 이유의 하나이다.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은 절대로 실패나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한다. 바꾸지 말고 그냥 살자는 측에서는 서로서로 이런저런 실패나 실수를 해도 일을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고, 그게 사람의 일이 아닌가 여겨 매우 편리하게 살아가지만, 바꾸자는 측에서 실패나 실수를 하는 걸 보게 되면 그냥 살자는 사람들은 마치 벌떼처럼 덤벼들어 "그것 보라! 왜 건드렸나!"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웬만하면 다시는 그런 주장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해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