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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교육

지금 여기에서의 사랑과 행복

by 답설재 2024. 6. 22.

 

 

 

젊음을 교단에 바쳤다고는 하지만 이것저것 제하고 나면 아이들을 직접 가르친 건 20년도 채 되지 않는다. 그나마 그 당시에는 부모 결손 가정이 흔하지 않아서 그런 점에서는 편한 교사 생활을 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내가 담임한 아이들은 아버지나 어머니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눈에 띄면 마음만으로라도 특별히 유념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D시에 전입해서 맨 처음에 만난 아이는 아버지가 없어서였는지 자주 내게 다가왔는데 나는 그게 오히려 고마워서 지금도 그 아이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잘 살고 있겠지' '이제 초로의 할머니가 되었겠구나...'

 

교육부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고 마지막 5년 반 동안 교장으로 지낼 때는 여기서나 저기서나 결손가정의 아이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았고, 그런 아이들은 예전과 달리 눈에 잘 띄었다.

 

어떻게 해주어야 좋을지 막막한 경우는 얼마든지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학교 교문을 들어서는 아이들이 다들 멀쩡하게 보이지만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아슬아슬한 느낌을 주는 아이들이 많았다.

나는 선생님들께 그런 아이들을 잘 보살펴 주어야 한다고, 심지어 좀 편애해도 좋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는데 비관적인 생각을 하는 선생님도 적지 않았다. 그중에는 지금부터 아예 좀 냉담한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그래야 독립심을 갖게 되지 않을까 싶다는 선생님도 있었다.

"막막해요. 올해만 알뜰히 보살펴주면 저로서는 그만이지만 내년엔 어떻게 하죠?"

"저 아이가 중학교 진학을 하면 누가 보살펴 주죠?"

그러면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럴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건 결국 '사랑'밖에 없다.

"선생님 말씀이 옳아요. 그러니까 올해만 사랑해 주세요. 한번 더 바라봐 주시고 한번 더 쳐다봐 주세요. 잠깐 그냥 따듯한 눈길만 주셔도 좋아요. 그 아이는 집에 가서도 생각할 것이거든요. 어려울 때마다 선생님을 떠올리겠지요. 저는 그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해요."

"......"

"중학교에 가서요? 그건 우리가 걱정할 일이 아닐 수도 있어요. 우리는 까맣게 잊을 수도 있어요. 우리가 가르치고 보살펴야 할 아이들은 해마다 새로 정해지니까요. 그렇지만 그 아이는 선생님을 잊지 않아요. 어려울 때마다 떠올리겠지요. 어쩌면 잊을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어려울 때마다 세상은 늘 어렵지만은 않다는 건 생각하게 되겠지요. 사랑을 찾으려고 발버둥 치겠지요. 삭막한 세상 어딘가에는 사랑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잊지 않겠지요......"

 

 

"여러분의 교육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많이들 하지만, 바로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 온 아름답고 성스러운 기억이야말로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가장 훌륭한 교육이 될 겁니다. 인생에서 이런 기억들을 많이 갖게 된다면 그 사람은 평생토록 구원받은 겁니다. 심지어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속에 단 하나의 훌륭한 기억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덕분에 언젠가는 구원을 향해 한 발짝 나아가게 될 겁니다."

조시마 장로에게 그의 형 마르켈에 대한 기억이 그랬듯이, 그리고 알료사에게 조시마 장로에 대한 기억이 그랬듯이, 아이들에게도 일류사를 사랑했던 경험이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가치 있는 교육이 되어 그들을 삶에서 버티게 해 주고 결국에는 구원해 줄 것이라는 말이다.

 

 

왕은철 「나는 존재한다 따라서 사랑한다―토스토옙스키의 소설과 환대의 계보」(『現代文學』 2018년 3월호)에서 옮겨 썼다.

2018년이면 내가 학교를 떠난 지 9년 만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속으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선생님, 보세요! 이 글 좀 읽어보세요! 내 말이 맞지요? 이제 제 생각을 인정하시겠지요?"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사랑의 정의라면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를 쓴 버트런드 러셀에게 물어봐야 하겠지만 사랑 없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