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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교육

누구를 위해 똑바로 서서 큰소리로 말해야 하나?

by 답설재 2024. 12. 15.

콰이어트》(수전 케인)라는 책에서 "가장 효율적인 팀은 내향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이 건전하게 섞여 있고, 리더십의 구조도 다양하다."는 글을 읽고 깜짝 놀랐다. 교육이란 끝이 없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수십 년 간 아이들을 가르치며 내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혼자서 가슴 아파했다. 그 책을 다 읽고 나는 이렇게 썼다. 반성문이었다.

 

나는 자신이 '내향적인지 외향적인지'도 잘 모르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외향적이거나 내향적인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외향적이기도 하고 내향적이기도 한 것 아닐까 싶고, 얼마나 내향적인가 혹은 얼마나 외향적인가로 측정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 해도 나는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알쏭달쏭한, 애매한, 어정쩡한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다른 교사들처럼, 흔히 그렇게 이야기하는 대로, 똑바로 서서, 큰 소리로 이야기하라고 다그쳤다.

아래는 《콰이어트》를 읽을 당시 두 편의 소설에서 발견하고 옮겨 써놓은 글이다. 생각을 하게 되면 그 생각을 뒷받침하는 것들이 눈에 띈다.

 

 

 

해주는 낯을 심하게 가려서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애를 먹었다. 선생님이 발표를 시키면 앞으로 나가 선생님에게 귓속말을 했다. 제 생각은요, 늑대가 불쌍한 것 같아요. 이렇게 속삭이면 선생님은 해주 생각에는 늑대가 불쌍하대, 하고 아이들에게 말해주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해주를 바라보았다. 해주는 그 시선이 너무나도 화끈거려 공중으로 날아가고만 싶었다. 엄마는 담임교사와의 상담에서 어떻게 하면 애를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담임은 해주가 정상이 아닌 건 아니에요, 그냥 애들 성격이 다 다른 거예요, 라고 대답했지만 엄마는 꿋꿋이 물었다. 그래도 이런 애들한텐 보통 어떻게 하냐고요. 얘 이대로 크면 나중에…….

 

─ 서고운 단편소설 「빙하는 우유 맛」(《현대문학》2022년 12월호)

 

어릴 적 외조부 댁에 몇 번 간 적이 있다. 어머니와 외조부는 왕래가 잦은 사이가 아니었다. 그럴 법도 하지. 하여간, 그의 집에는 별다른 게 없었다. 하나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이 있다. 거북선 모양의 저금통. 내가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 비슷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어머니와 외조부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그것을 가지고 놀았다. 중얼중얼. 거북선을 밀고 당기면서. 바닥은 바다가 되고, 걸리적거리는 것은 모두 왜군이었다. 중얼중얼. 아버지는 나의 중얼거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내아이가 왜 그렇담. 크게 말해. 분명하고 똑똑하게. 하지만 무엇을. 내 머릿속의 장면을? 그 장면 속의 인물들을? 그것은 채 언어가 되기 전의 이야기였다. 언어가 되어버리고 나면 죽어버릴 이야기였다. 아버지의 다그침에 나는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찔찔이. 아휴 저 찔찔이. 하고 싫어했지. 외조부의 빈소에서 가족들과 모여 앉았을 때 나는 어머니에게 거북선 저금통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머니는 기억하지 못했다.

 

─ 유희경(시인) 에세이 「나의 반려伴侶, 이야기」(《현대문학》2022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