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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달빛 가득한 밤

by 답설재 2024. 5. 29.

 

 

 

서울에 가면 이런 시간에도 불야성이겠지.

서울 아니어도, 가로등만으로도 밤새 하얗게 밝은 곳도 얼마든지 있지.

자칫하면 세상이 쓸쓸한 줄도 모르고 외로운 곳인 줄도 모르게 되지.

건너편 아파트를 내다보면 매일 밤 몇 집은 밤새 불을 밝히고 있지.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나?' '누가 아파서 도저히 불을 끌 수가 없나?'...... 그런 걱정 없이 자리에 들며 그나마 다행이라는 느낌으로 잠들게 되지.

 

이곳은 전혀 달라.

가로등이 없어.

너무 적적해.

개울 건너편 나지막한 집 보안등만 밤새 반딧불처럼 깜빡여.

나만 불을 밝혀두면 온갖 벌레들이 다 모여들겠지. 내가 모르는 짐승 두어 마리가 저 집 뭐 하는지 가보자고 할 수도 있겠지. 나는 그건 싫어. 걱정스러워.

 

그렇게 잠들면 반쯤 열어놓은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온 달빛이 잠깐 눈 좀 떠보라고 깨울 때가 있어.

그럼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일어나.

창문을 내다보면 나의 천지는 조용한 달빛 아래 빛나고 있어.

그런 줄도 모르고 잠들어 있었던 게 미안하고 속은 것 같고, 그래서 그렇게 지나가버린 시간이 잘못 써버린 돈처럼 아까워.

다시 자리에 누워 잠들며 생각해. '나는 달빛 아래 잠들고 있어. 이제부턴 달빛이 나를 지켜주게 돼. 이건 사치야. 돈은 들지 않고 그 대신 피할 수도 없는 그런 사치야.'

 

그렇게 잠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지난밤 그 달빛은 가고 없고 나는 그 사실을 기억하지도 않아.

그러고는 밤이 되면 어린애처럼 또 달빛이 찾아오기를 기다려.

영리하고 용감하고 거기다가 돈도 많아서 뭔가 정복해 버리는(더럽히고 망가뜨리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인간들이 달을 정복해 버리면 이런 밤도 사라지는 걸까?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사라져 버릴 거니까 어떻게 되는지 나중에 누가 그것만 꼭 좀 알려주면 좋겠어.

(이건 부끄럽고 해서 숨기려고 했는데...... 세상에 변함없었고 변함없을 것은 내겐 그것뿐일 것 같아서 그래. 이해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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