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모두 수용되고 허용되는 곳

by 답설재 2024. 12. 9.

나쁜 짓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남을 괴롭히고 하면 결국 다 드러나서 비난을 받고 벌을 받고 뉘우쳐야 하기 마련이므로 나쁜 짓을 했거든 솔직하게 털어놓아 속이지 말고 그러기 전에 아예 나쁜 마음 같은 건 먹지도 말고 순리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그래서 도의가 있어 면면히 전해지는 것이고 교회나 절에 가거나 가지 않거나 함부로 신을 부정하거나 가벼이 말할 수 없는 종교가 있고 누구나 최소한의 교육을 받는 것이고 그래도 선을 넘는 인간들이 있을 수밖에 없어서 정해진 법률에 따라 잘잘못을 따져 형벌을 가하는 것이 이 세상 이치가 아닌가 싶어 그렇게 살고 그렇게 가르치고 속상한 일이 있어도 이건 순간에 지나지 않으며 곧 이치에 따라 합리적인 흐름이 눈앞에 전개될 것을 기대하며 살아오고 살아가고 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흐름이 보이지 않고 보일 기미도 없어서 뭐가 이런가 싶고 다 포기하고 말아야겠구나 생각하게 되는 것이 요즈음 생각이다.

'역시 그렇구나' 싶은 글을 하나 발견해서 옮겨 썼다. 

 

 

정해진 식사 시간이 있기 때문에 다 같이 합심해 잔뜩 긴장된 상태로 식사 준비를 마치고 나면 공양간의 보살님들은 뒷정리하면서 서로 고성이 오가는 싸움을 했다. 기독교에는 지옥과 천국이 있다면 불교에는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수라도' '인간도' '천상도'의 '육도'라는 개념이 있다. 중생은 이 육도를 돌아다니며 윤회한다고 하는데 죽음 다음 이 육도 중 한 곳에 골라서 떨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한순간의 마음 상태에 따라 매 순간 지옥과 천상을 오간다. 자원봉사자한테는 한없이 다정하고 친절하신 '보살님'들이 세력 싸움에 들어가면 권력 욕구와 생존 욕구를 드러내며 아귀다툼하는 것을 보았다. 보살님마다 사연과 사정이 있는 만큼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는 옳았다. 그 누구의 편도 들 수가 없었다. 그분들이 만들어내는 담백하고 정갈한 음식을 먹고 사람들은 평온을 느끼지만, 그 음식들이 만들어지는 내부는 날마다 전쟁터였다. 마치 밖에서 본 나와 실제 내 마음속의 상태가 그러하듯이.

불교의 '유식'에서는 세상이 곧 마음이고 모든 것은 내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보는 모든 것, 내가 만난 모든 사람은 나의 잠재의식(아뢰야식) 안에 씨앗으로 잠재되어 있다가 인연에 따라 현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의 세력 다툼이 거슬리고 보기 어려운 건 내 안에도 그런 세력 다툼이 있기 때문이다. 내 잠재의식 안에 생존 욕망과 권력욕이 있기에 그 욕망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내 눈앞에서 다툼을 벌이면서 육도윤회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공양간의 싸움 틈바구니에서 마음이 한껏 어지러워서 평온을 찾아 법당에 가면 그곳에는 또 자리다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붓다는 삼법인 설법을 통해 '무상' '고' '무아'를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은 없고, '나'라고 할 만한 것도 없고, 괴로움뿐이라고 하셨는데 사람들은 그 말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나와 내 가족의 영원한 무병장수와 복덕을 빈다. 붓다의 말씀과 신도들의 기도가 모순되지만, 그것들이 충돌하지는 않는다. 절에서는 모순된 것들이 그대로 모두 수용되고 허용된다.

 

- 정은(에세이) 「버섯 채집」(《현대문학》 2024년 11월호)에서.

 

 

 

'내가 만난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분노·절망이 악덕이라고?  (8) 2024.12.13
보고서 만들기  (9) 2024.12.12
텔레비전이 뭐냐고 묻는다  (5) 2024.12.07
버리기 - 다 버리기  (16) 2024.12.06
버리기 - 책 버리기  (12) 2024.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