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초에 피렌체의 화가 조토는 한 성당의 벽을 프레스코화들로 장식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 성당에는 14개의 벽감(壁龕)이 있었으며, 조토는 그 하나마다에 서로 다른 미덕이나 악덕을 알레고리화한 초상화를 하나씩 그리게 되었다. 그는 회중석에 가장 가까운 오른쪽 벽에 우선 기본적인 미덕으로 일컬어지는 "신중" "용기" "절제" "정의"를 그렸고, 그다음으로는 기독교의 미덕으로 일컬어지는 "신앙" "자비" "희망"을 그렸다. 그리고 반대편인 왼쪽 벽에는 이에 상응하는 악덕들을 배치했다. "우둔" "변덕" "분노" "불의" "불성실" "시기" "절망"이었다.
알랭 드 보통이 쓴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를 읽다가 이 부분에서 의아해졌다.
신중, 용기, 절제, 정의가 기본적인 미덕이고 신앙, 자비, 희망이 기독교의 미덕이라고 한 건 그렇다 치고(그중 두 가지는 기본적인 미덕이라 해도 좋을 듯하지만), 우둔, 변덕, 분노, 불의, 불성실, 시기, 절망이 악덕이라고?
우둔한 것도 악덕이라고? 어리석고 둔한 게 악덕?
변덕, 불의, 불성실, 시기는 그렇다 치고 분노, 절망까지 악덕이라고?
희망이 없어져서 체념하고 포기하는 게 악덕이라면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걸까? 극한 상황을 맞아 한계와 허무함을 자각할 때의 그 절망감을 어떻게 하라는 걸까?
분노, 절망감을 느끼는 사람이 그냥 참고 있어야 자기네들이 편하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었을까? 분노, 절망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지면 세상이 혼란에 빠지게 될 것 같으니까 그런 사람들이 아예 드러나지도 못하게 하려는 수작이 아니었을까?
모르겠다.
요즘도 그렇게 이야기하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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