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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노년47

나이든 사람들은 불쌍한가? 《죽음의 수용소에서(Man's Search for Meaning, 빅터 프랭클)》라는 책에서 세 토막의 글을 옮겨놓았습니다. 둘째 세째 토막만 옮겨쓰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면 의미 파악에 지장이 있어서 첫째 토막까지 옮겨놓았는데 첫째 토막은 그 의미가 어렴풋해서 둘째 토막의 맥락이 연결되는 것만으로 넘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적절하게 행동할 기회와 의미를 성취할 수 있는 잠재력은 실제로 우리 삶이 되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에 영향을 받는다. 물론 잠재적 가능성 그 자체도 큰 영향을 받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기회를 써버리자마자 그리고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키자마자 단번에 모든 일을 해버린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과거 속으로 보내고, 그것은 그 속에서 안전하게 전달되고 보존.. 2021. 11. 14.
조언과 동정 조언과 동정 1 <데저트 아일랜드 디스크>에서 죽음에 관해 얘기한 후, 내 친구 R은 경찰에게 산탄총을 압수당했고 나는 여러 통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 그 편지들에는 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믿음에 나 자신을 열어 보이고 교회에 가고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등등을 통해 두려움.. 2016. 11. 17.
세월 '또 가을…….' 아파트 뒷마당을 지나며 생각했습니다. 지난해 어느 초가을 저녁, 바로 그곳에서, 그 생각을 하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낮에 버스 안에서는 전혀 다른 느낌을 이야기하는 걸 들었습니다. 풋풋한 아가씨들이었습니다. "오늘이 화요일이야?" "응." "날짜 더럽게 안 가네!" 나도 그랬었습니다. '나도 저 나이가 될 수 있을까?' '어쩔 수 없어서라도 먼저 이야기하도록 바라봐줄 때가 오기나 할까?' 그게 예고도 없이 와서 지나가려고 합니다. 어이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아가씨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줄 것까지는 없을 것입니다. 그걸 미리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쓸데없는 일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2016. 9. 29.
2016 가을엽서 하늘이 높습니다. 연일 가을구름 퍼레이드가 펼쳐집니다. 밤은 더 깊습니다. 책을 들면 1분에 한두 번씩 눈이 감기는 것만 아니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까무룩' 내처 가버려도 그만일 길을 매번 되돌아오긴 합니다. 이런 지 꽤 됐고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몸은 한가롭고 마음은 그렇지 못합니다. 두렵진 않은데 초조합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2016. 9. 15.
'현강재'의 설악산 '현강재' 강원도 고성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안병영 연세대 명예교수의 블로그 이름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부총리겸교육부장관을 지낸 분이다. 김영삼 정부 때도 교육부장관을 지냈다. 나는 그 이전에 교육부에 들어가서 그분이 두 번째 장관을 지낼 때까지도 그곳에서 근무했다. 애들 말마따나 "죽도록" 일했다. 그렇지만 뭘 했느냐고 물을 때 대답할 말을 아직도 준비하지 못했다. 일기(日記)는커녕 메모할 겨를도 없을 정도로 지쳐서 숨 좀 쉬고 준비한다는 게 이렇게 됐다. 묻는 사람도 없긴 하다. 일전에 '현강재'에 가서 "저 울산바위를 닮으셨는가, 그래서 그곳에 계시는가 생각했다"면서 블로그에 장기간 새 글이 보이지 않으면 궁금하지만 농사일 때문이겠지 한다는 댓글을 달았더니 이튿날 "가을의 문턱에서"라는 제목의 글.. 2016. 9. 13.
자판기 앞에서의 추억에 대한 感謝 "가만있어 봐…… 어느 걸로 할까?" 오랫동안 그렇게 지냈습니다. 즐겁진 않아도 괜찮은 순간들은 많았습니다. 그런 순간들이 있어서는 안 될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돌연 그 시간이 종료된 걸 알았습니다. '하나 마셔볼까 말까?' 그 정도여도 좋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신다고 죽는 건 아니라면서까지 마실 일도 없는 것이어서 어느 새 별 관계가 없는 사이가 된 것인데 그게 섭섭해서, 별 게 다 섭섭해서 지날 때마다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이런 절차 없이 어느 날 모든 것이 한꺼번에 끝날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차한 시간들이 기다린다는 건 생각지도 못한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더 빛나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합니다. 이 시간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웃기는 .. 2016. 9. 6.
건너편의 빈자리 건너편의 빈자리 Ⅰ 점심시간이 되려면 한참 더 있어야 할 이른 시각의 식당가, 좀 뻔뻔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더니 저렇게 이번에는 건너편 자리에 와서 앉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Ⅱ 바쁘게 지내는 사람들과 모처럼 점심 약속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사무실에 들렸다가 나가기는 어중.. 2016. 8. 18.
서대경 「까마귀의 밤」 까마귀의 밤 서대경 헌책방 구석 책 무더기 속에 파묻혀 있는 작은 책상 위에 웅크려 있던 백발의 노인이 잠에서 깨어나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다. 문 닫을 시간이야. 노인의 왼쪽 눈이 소리친다. 벌써 어두워졌군. 노인이 입가의 침을 닦으며 중얼거린다. 문 닫을 시간이라고. 알아. 노인이 대답한다. 노인은 의자에서 일어나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책장들 사이로 난 비좁은 통로를 걸어간다. 영업시간이 끝났으니 내일 다시 오시오! 노인의 목소리가 텅 빈 공간에 메아리친다. 노인은 산발한 머리를 갸우뚱하며 오른쪽 눈이 깨어나길 기다린다. 일어나. 게으름뱅이야! 노인은 춤을 추듯 몸을 앞뒤로 건들거리며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간다. 노인은 책상 위에 놓인 원고 뭉치를 내려다본다. 노인은 원고를 집어 든다. 밤길 걷는 사.. 2015. 9. 16.
타우노 일리루시 『지상에서의 마지막 동행』 타우노 일리루시 『지상에서의 마지막 동행』 박순실 옮김, 대원미디어, 1995 노부부의 가슴 짠한 사랑과 사별(死別)을 다룬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감독 진모영)가 개봉 15일 만에 관객 40만명을 넘어서며 일일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11일까지 총 관객 수는 42만118명. 290만 관객을 모은 역대 다큐 최고 흥행작 '워낭소리'보다 13일 일찍 '40만명 고지'에 올랐다. …(중략)… 오동진 영화평론가는 "복고(復古)와 향수(鄕愁)라는 시대 코드를 멜로 형식에 담아 자연스럽게 젊은층도 호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사 진진 김난숙 대표는 "'저렇게만 살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하게 되는, 눈물 흘리면서도 행복한 영화"라고 했다. 신문기사입니다.* 그것도 이미 지난 주.. 2014. 12. 16.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아직도 짜증을 냅니다. 몸이 마음 같지 않아서이기도 하겠지만, 주로 수양이 덜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한심한 수준이면서 남들이 하는 꼴을 부드럽게 보아 넘기지 못합니다. 그럴 때마다 반성을 합니다. '내가 왜 이럴까?'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할까?'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의 말씀을 찾아봤습니다. '예순이면 이순(耳順)이라는데…… 예순이 지난 지 옛날이고, 낼모레면 일흔인데……' ♣ 나는 열다섯에 學에 뜻을 두고, 서른에 서고, 마흔에 不惑하고, 쉰에 天命을 알고, 예순에 耳順하고, 일흔에 하고싶은 바를 좇되 法度를 넘지 않았느니라. (孔子) 原文──爲政 四 子曰 『吾十有五에 而志于學하고 三十而立하고 四十而不惑하고 五十而知天命하고 六十而耳順하고 七十而從心所欲하야 不踰矩호라』 解義 …(전략)… .. 2013. 4. 24.
조정인 「문신」 문신 - 조정인 (1954 ~ ) 고양이와 할머니가 살았다 고양이를 먼저 보내고 할머니는 5년을 더 살았다 나무식탁 다리 하나에 고양이는 셀 수 없는 발톱자국을 두고 갔다 발톱이 그린 무늬의 중심부는 거칠게 패었다 말해질 수 없는 비문으로 할머니는 그 자리를 오래, 쓰다듬고 또 쓰다듬고는 했다 하느님은 묵묵히 할머니의 남은 5년을 위해 그곳에 당신의 형상을 새겼던 거다 고독의 다른 이름은 하느님이기에 고양이를 보내고 할머니는 하느님과 살았던 거다 독거, 아니었다 식탁은 제 몸에 새겨진 문신을 늘 고마워했다 식탁은 침묵의 다른 이름이었다 부끄럽지만 한때 내가 죽으면 그 무덤에 세울 비석에 새기라고 부탁할 글을 구상한 적이 있다. 그렇게 한다면 나를 만나보지 못한 내 후손 중에는 나를 무슨 중시조(中始祖)나.. 2011. 4.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