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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지나가버린 꿈의 나날들

by 답설재 2023. 9. 3.

 

 

 

나는 지금 자그마한 아파트에 삽니다.

처음엔 돌아눕기도 어렵겠다, 숨 쉴 곳도 없다 싶고 여러 가지로 불편하더니 지금은 이만해도 괜찮다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이 아파트에서 이렇게 작은 집들은 3개 동입니다.

어쩌다가 젊은 부부나 어린아이와 사는 집도 있지만 다 늙어서 부부가 등산이나 다니거나 뭘 하는지 둘이서 들어앉아 있는 집이 많습니다. 젊은 아주머니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엘리베이터를 타면 잠깐이라도 분위기가 달라지는데 늙어버린 부부가 타면 그들끼리나 서로 간에나 아무 말이 없고 무표정합니다.

주차장에 내려가보면 평일인데도 차가 별로 빠지지 않습니다. 출근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사 오는 집을 봐도 그런 사람들입니다. 들어갈 공간이 없어 버려져야 마땅한 서장, 저렇게 어처구니없이 큰 액자 같은 물건이 버려집니다.

저게 왜 필요했겠습니까?

직장에 다니고 할 때는 저 액자의 주인도 호기로웠기 때문입니다.

힘차게 부딪혀 하얗게 부서지는 저 파도처럼, 심지어 바다에서도 우뚝우뚝 솟아오르는 저 바위처럼 살아가고 싶었을 것이고, 가족들은 그런 가장을 믿고 따르고, 그런 가장에게 크고작은 불평불만이 있어도 그러려니 하고 바라보기만 했을 것입니다.

그런 나날들이었지만 이젠 그렇지 않게 되었고 고분고분한 가족이 없게 되었고 그 가장이 앉을 자리는 좁아진 집 어디도 마땅치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나는 저런 물건을 미리 다 버렸습니다.

가족들 몰래 버리면 좋겠다 싶은 건 혼자 있을 때 얼른얼른 버렸고, 이건 남아 있으면 나중에 분명히 비웃음의 대상이 되겠다 싶은 건 미리 버렸습니다.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하고 실행하며 지냈습니다.

어떤 건(예를 들면 부질없는 감사패, 내 직책과 이름을 자개로 박은 명패) 학교에 있을 때 '기사님'(주무관님, 내가 젊었을 때는 용인 혹은 소사...)에게 부탁해서 아이들 공부 시간에 쓰레기장에서 파쇄하라고 했습니다. 기사님은 '이걸 왜 버리지?'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마지막 날, 그러니까 내 인생의 마지막 퇴근 날, 나는 서류봉투 하나만 가지고 학교를 나왔습니다. 그 전날까지만 해도 배웅하는 행정실 직원에게 "내일 봅시다~" 하고 인사했는데 그날은 "잘 계십시오~" 했습니다. 특별한 인사를 해서 '이 사람이 마지막 날 인사를 하는구나...' 생각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이승에서 떠날 때도 그렇게 떠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도 나는 아직도 부질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나 자신만 남겨야 했을 것이지만 나 자신인들 부질없는 것이 아니라고 하기엔 우습습니다.

 

그건 그렇고 저런 물건은 저쪽 집에서 미리미리 버렸어야 할 물건이 아니겠습니까?

그걸 이삿짐 속에 넣어 힘들여 여기까지 갖고 와서 둘 만한 곳이 없어 버리게 될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서글프고 겸연쩍었겠습니까? 가족들 보기에도 미안하고 쑥스럽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말하지 않아도 짐작됩니다.

지나가버린 나날들, 그 날들의 꿈이었고, 버려진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이란 무엇인지, 이 아파트의 이런저런 폐기물이 놓여 있는 곳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인생'이란 단어를 떠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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