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란 개성의 유일성唯一性의 외면적인 징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질적으로 개성은 개성 그 자체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개성의 유일성은 그것이 독립된 존재로서 '다른 어떤 것이 출입해야 할 창을 가지고 있지 않고', 자족적自足的인 내면적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성립한다. 개성은 자기 활동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기 구별적인 것으로 자기의 유일성唯一性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어떤 시간에 태어나는가 하는 것은 마치 음악의 한 곡 안에서 어떤 순간에 어떤 음이 오는가 하는 것이 우연이 아닌 것처럼 나의 개성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나라고 하는 개성의 내면적인 의미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시간의 형식에 의해 음악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음악 속에서 진정한 시간 그 자체를 체험하는 것이다. "자연을 이해하려고 하는 자는 자연처럼 침묵으로 자연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개성을 이해하기를 원하는 자는 시간이 웅성거리는 것을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능변을 붙잡아 그 목을 비틀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시간의 흐름을 벗어나는 것은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는 아득한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흐르는 시간 속에 자기를 담그고 진정으로 그 시간 자체가 되었을 때이다. 단순한 인식의 형식으로서의 시간에서 해방되어 순수하고 지속적으로 자유에 몸을 맡겼을 때이다. 바라다보는 곳에 개성을 이해하는 길은 없다. 나는 다만 활동으로써 내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한결같이 추이推移하며 유하流下하는 검은 막과 같은 시간의 속박과 굴레에서 도망쳐 나올 때, 나는 무한을 획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 활동적인 것은 무한한 것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이다. 단지 무수의 부분에서 합성된 것이 무한이라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것의 부분은 전체가 한정되어 생기는 것으로 항상 전체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모든 영혼을 내던지고 활동할 때, 나의 개개의 행위에는 내 개성의 전체가 현실적인 것으로 항상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
이 글은 "한 개의 개성은 전 세계의 의미를 유일한 방식으로 현실화하고 표현하는 미크로코스모스(소우주)"이고 "개성은 자기 자신 속에 다른 것과의 무한의 관계를 포함하면서 게다가 전체속에 점하는 유례없는 위치에 의해 개성"이라는 이야기로 나아가고, 다시 "영원한 것의 관상觀想 속에 자기를 잃을 때, 나는 아름다운 절대 고독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로 이어지고, 그 이야기는 또 "자기를 아는 것은 머지않아 타인을 아는 것"이며 "우리가 우리의 영혼이 스스로 도달한 높이에 따라 우리 주위에 점차 많은 개성을 발견해 간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렇게 해서 개성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획득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로 나아가고 있다.
나는 몇 번 '내가 지금 뭘 읽었지?' 하며 이 글을 읽어 나아갔고 그렇게 해서 "나는 그냥 사랑함으로써 다른 개성을 이해한다"는 결론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다시 한번 나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된 것은, 미키 기요시(三木 淸)는 이 글(「개성에 대하여」)을 1920년 5월, 그가 대학을 졸업하기 직전 《데츠가구겐큐(哲學硏究)》에 게재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내가 글을 쓰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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