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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그리운 메타세쿼이아, 그리운 계수나무

by 답설재 2023. 9. 7.

 

 

 

위쪽은 메타세쿼이아, 아래쪽은 계수나무입니다.

사이로 보도블록이 깔려 있는 길을 나 혼자서 '오솔길'이라고 부릅니다.

 

오래전 D시 사범대학 부속초등학교에 근무할 때, 그 학교 앞으로는 그 시가지에서 가장 넓은 대로가 지나가고 그 대로변 학교 담장 안쪽으로는 수십 그루 나무와 맥문동 등 갖가지 풀들로 이루어진 한적한 곳이 있었는데 나는 우리 반 아이들과 함께 그 나무 아래 길을 '사색의 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반 놈들이 다툴 때마다 "둘이서 손 잡고 사색의 길을 두세 번 왔다 갔다 하고 돌아와! 두 번 돌아야 할지 세 번 돌아야 할지는 너희가 돌면서 정해!" 했습니다.

그 산책로를 다녀온 그놈들은 그것으로 다 해결되었다는 듯 내 허락도 받지 않고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교장선생님은 그 길 입구에 정말로 "사색의 길"이라는 팻말을 세워 주었습니다. 아, 멋진 교장선생님... 

 

나는 이 아파트 여기저기에 서 있는 메타세쿼이아를 바라볼 때마다 '뭐지? 왜 저렇게 키가 크지? 저 높다란 나무가 뭐가 좋다고 저렇게 심어 놨지?' 생각하며 지냈는데, 마쓰이에 마사시의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읽은 후로는 저 나무가 눈에 띌 때마다 그 소설에 나오는 후지와라 선생과 그의 아오쿠리 별장을 떠올립니다.

멋진 후지와라 씨는 그의 건축사무소 직원들로부터 최고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고 아오쿠리 별장은 여름철에 사무소 직원들이 그곳으로 가 작업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워낙 감명 깊게 읽은 책이어서 그런지 지금도 그들이 실존인물로 여겨져 우리 교포 淸님께 혹 그런 곳에 그런 인물이 있었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할 뻔했었습니다. 또 하늘 높이 솟아오른 저 메타세쿼이아가 후지와라 선생의 그 그윽하고 어딘지 좀 쓸쓸한 인품을 나타내는 것 같아서 저 나무들을 자꾸 올려다보게 되고, 그와 같은 인물을 책에서 그리고 실제 세상에서 잘 보았으면서 나 자신은 이렇게 빈약한 걸 안타까워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무라면 다 좋아하지만 계수나무는 그렇게 볼품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필이면 계수나무를 많이 심은 이유를 모르겠는데 이 아파트 중간 마당에는 저 계수나무 수십 그루가 서 있습니다. 가을만 되면 그 마당이 노랗게 물들어 "노랑이란 이런 거야!" 하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곧 또 그런 가을이 되겠지요.

 

저 계수나무를 보면 당연하다는 듯 보름달, 그 달 속의 계수나무를 생각하게 되고, 기필코 그 달의 정체를 파헤치고 말겠다는 인간들의 의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지구에 싫증이 나서?

지구의 환경이 극도로 나빠졌고 회복될 가능성도 없어 달에 가서 살려고?

우선 달부터 정복하고 장차 온 우주를 정복해 버리려고?......

 

달에는 어떤 사람들이 가게 될까요?

돈을 많이 낼 수 있는 사람?

아니면 올여름만 해도 환경오염에 따른 이상기후로 생각지도 못한 피해를 입는 걸 보고 지구에서의 삶에 위기의식을 느낀 사람?......

이러지 말고 지구부터 살려야 하지 않을까요?

 

땀을 닦은 휴지를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돌아오고, 재활용품 배출일에 잘 분리해서 버리고, 웬만한 곳은 걸어서 가고, 대중교통을 더 이용하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면 이 지구는 다시 옛날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운 곳이 될까요? 혹 그 정도로는 불가능하다면 힘 빠지는 일 아닌가요?

더 중요하고 위급한 일이 있다면 그런 일은 어떤 일이고 누가 해결해야 하는 것일까요?

지금 이렇게 오염된 세상이지만 언젠가 이런 세상이나마 그리워하게 되는 날이 오는 건 아닐까요?

 

우주복을 입고 눈물을 흘리면서 지구를 떠나 달로 가며 '아, 그리운 메타세쿼이아여!' '아, 그리운 계수나무여! 그리운 그 옛날의 달이여! 달빛이여!' 하고 그리워할 날이 오지 않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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