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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부산 국제시장에 앰프 사러가기

by 답설재 2024. 1. 13.

 

 

 

김위복(金位福) 교장선생님은 진짜 무서운 분이었다. 우리는 정말이지 끽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완전' 절절매며 지냈다.

 

지서 순경들도 우리처럼 쩔쩔맸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물어볼 것도 없었다.

교장선생님은 교사 경력이 단 6개월이었고 교감도 거치지 않고 바로 교장이 되었다고 했다. 초임교사 시절에 6.25 전쟁이 일어났고, 인민군이 '삐라'(전단)를 만들려고 등사기 좀 빌려달라고 아무리 간청을 해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일이 알려져 당장 교장 발령이 났고 이후로 계속 교장이었다는 것이다.

 

운동회가 끝날 무렵,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선배 교사들이 우르르 학교 앞 도로로 뛰어나가 줄행랑을 칠 때,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들을 따라 달리느라고 숨을 헉헉거리며 왜 이러는지 물었고, 운동회가 엉망이어서 교장선생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라는 말을 들었다. 캄캄해졌을 때 삼삼오오 교문에 들어서자 그때까지 학부모 몇 명이 운동장 정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학교 행사를 앞두면 미리부터 눈치를 봤고 행사 중에도 행사 후에도 그 행사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교장선생님의 평가가 궁금해서 숨을 못 쉴 지경이었다.

 

그런 교장선생님이 유독 나에게는 이유도 없이 관대했다.

사범학교 출신(고졸) 교사가 많긴 해도 2년제 교육대학을 나온 교사가 나밖에 없는 것도 아니었다.

운동장에서 체육을 하던 우리 반 놈들이 대소동을 벌여도 교장선생님은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고, 내가 숙직하는 날 막걸리 좋아하는 교사 몇몇이 교장 사택 닭장에 숨어 들어가 잠든 닭 몇 마리를 잡아먹었어도, 이튿날 아침 숙직교사가 나였다는 걸 알면 불문에 부쳤다.

 

일이 일어난 건 1970년이었다.

방송시설(앰프)이 고장 날 때마다 50리 길 읍내 기술자를 불러야 했는데 그 앰프는 보통은 1~2일, 길어야 2~3일에 한 번꼴로 고장이 났다.

이래서는 해먹을 수가 없다 싶었던 어느 날, 교장선생님이 나를 부르더니 그때 돈 30만 원이 든 봉투를 내놓으면서 부산 국제시장에 가서 일제 중고 앰프를 사 오라고 했다.

 

이럴 수가!

나 혼자? 혼자!

내가 부산을 어떻게 가나!

내가 국제시장을 어떻게 찾아가나!

내가 일제 중고 앰프를 어떻게 알아보고 제대로 구입하나!

내가 있어도 극성스러운 우리 반 놈들은 어떻게 하고 가나!

 

 

 

 

 

어쨌든 가긴 갔지.

교감선생님이 아이들 걱정은 아예 말고 이틀이든 사흘이든 중고 앰프만 사 오면 된다고 달랬고, 그래서 내가 그 기계를 사 온 건 분명했고, 그때부터 그 앰프가 고장 나면, 뭔가 작동이 잘못되어 소리가 나지 않거나 소리가 너무 작거나 하면 교사들은 그 기계를 마음대로 작동했으면서도 무조건 나를 불렀고, 나는 어떻게든 그 기계를 살려내곤 했다.

신통한 건 웬만한 일은 읍내 기술자를 부르지 않고도 쉽게 해결되었다.

 

지금 국제시장 지도를 살펴봐도 내겐 아무 기억이 없다. 이후로 거기를 가 본 적도 없고 그로부터 오십 년이 훌쩍 넘었으니 무슨 기억이 있겠나.

혹 그때 앰프를 산 가게 이미지라도 떠오를까 싶어서 인터넷에 들어가 '국제시장 중고 음향 시설' 이미지를 검색해 봤더니  '국제시장 맛집' '구미 전자제품' 같은 곳 사진이 주르륵 쏟아졌고 그 속에는 중국 어느 곳 전자제품 가게도 있었는데, 그 어마어마한 사진들 속에서 "여기닷!"(바로 이런 곳이었겠지?) 싶은 가게 사진이 보였다.

 

art20jo 님의 블로그 「아트전자음향」! 

     ☞ https://blog.naver.com/art20jo/222002396010

 

분명하다! 이런 곳이었을 것이다!

 

내 기억 속에서 그 일에 관한 것들은 다 사라졌다. 내 머릿속은 텅 비었다.

사라진 그 기억들이 그립다.

생각나는 건 그 앰프와 함께 몇 장의 LP를 사다가 전교생에게 들려준 일이다.

쑥스럽긴 하지만 그즈음 나는 삶은 달걀을 무지 좋아해서 부산 내려가는 완행열차 안에서 세 개씩 묶은 삶은 달걀을 네 번 그러니까 열두 알을 사 먹었고, 목구멍으로부터 올라오는 닭똥 냄새가 너무 심해서 점심은 사 먹지 않았는데, 그 후일담을 들은 동료교사들은 이후 나를 '달걀귀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들도 그립긴 하지만 김위복 교장선생님은 훨씬 더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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