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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나무의 기억

by 답설재 2024. 1. 9.

 

 

 

 

'나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의 주인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 '내가 떠나면 세상은 어떻게 되나?'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내가 떠나도 저 나무는 당연하다는 듯 저기 저렇게 서 있겠지.'

그럴 때 나는 나무를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느 날 나무는 생각할 것이다.

'한때 그가 이 길을 다녔지. 그의 잠깐을 영원처럼 여겼지.'

나무는 다시 다른 사람이 오가는 걸 보면서 곧 나를 잊을 것이다. 잊진 않을까? 사람은 무엇이든 금세 잊거나 오래 기억하거나 하지만 나무는 기억할 것은 영원히 기억하고, 기억하지 않을 건 아예 염두에 두지 않는지도 모른다.

 

나무는, 가령 저 밤나무 같으면 어떻게 적어도 150년 혹은 수백 년을 살까?

당연히 할 일이 있겠지? 할 일도 없는데 태어나고 살아 있는 뻔뻔한 존재는 없을 테니까.

 

 

잘 자란 참나무 한 그루에는 최대 50만 개의 잎이 달린다. 각각의 잎은 폐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기공stomata'이라는 미세한 구조로 뒤덮여 있다. 이 기공을 통해 이산화탄소가 들어오고 산소가 빠져나간다. 나뭇잎 1제곱밀리미터에는 100개 내지 1,000개의 기공이 있다. 그 모든 기공이 다 함께 지구의 거대한 호흡 체계에 기여하고 있다.

겨울이 되면, 잎이 없는 나무는 호흡기관 대부분을 잃고 조용히 지낸다.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는 갈 곳도 없고 할 일도 없고 누가 집에 데려가지도 않아서 정처 없이 어슬렁거린다. 그러다 6월이 오면 새로 자라난 수십만 개의 푸른 잎이 다시 생기고 이산화탄소로 가득 찬 공기를 완전히 문자 그대로 청소한다. 더 북쪽의 숲으로 갈수록 이산화탄소는 더 특별히 눈에 띈다. 이 같은 청소는 날이 추워질 때까지 계속되다가 11월이 되면 상황이 뒤바뀐다(그리고 계속 반복된다).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가 쓴 《우아한 우주》(프시케의숲, 2022)의 '유월이 만드는 변화'라는 글의 시작 부분이다.

나무는 왜 저렇게 조용히 서 있다가 유월이 되면 푸른 잎을 달게 되는 것일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산소 공장'을 운영하는 것일까?

사람을 위해서?

잠깐만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뻔뻔한 생각이고 내가 나무라 해도 가소로워서 웃음이 날 것 같다. '사람을 위해서라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렇지, 무슨 희생정신을 발휘한다고 사람을 위해 산소를 만들겠는가? 잠깐 사이에 세상을 이 꼴로 만들어 놓는 인간들이 뭐가 좋다고 희생정신까지 발휘하겠는가!

 

그렇다면 도대체 뭘 위해서지? 어떤 목적에서지?

그건 너무 어려워서 나 같은 사람은 해결할 수가 없는 문제이고, 과학자들은 이상하게도 그런 데는 관심이 없어서 그들의 견해를 부탁할 수도 없다. 과학자들은 나무고 물이고 하늘이고 간에 뭐든 어떻게 하면 씨도 남기지 않고 몽땅 이용할 수 있을까, 거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무는 왜 있을까?" 그런 한가해 보이는 질문은 결국 나도 그냥 놔두는 수밖에 없다.

 

하기야 저 글을 쓴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라는 여성도 나무들이 마치 자신을 위해서, 사람들을 위해서, 그러니까 인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써놓았다. 저 글에는 이런 문장도 보였다.

 

 

우리 지구에는 3조 그루 넘는 나무가 있다. 한 사람이 400그루씩 거느리는 셈이다. 은하수에 있는 별의 수보다 지구상의 나무 개수가 더 많을 것이다. 대륙의 대부분이 북반구에 있으므로 나무도 당연히 그렇다. 이 세상의 온대림은 대부분 캐나다, 시베리아, 스칸디나비아에서 볼 수 있다.

 

 

서글픈 일이지만 나로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번에 저 나무에게 가면 좀 조용히 물어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를 어떻게 생각해?'

'나중에 내가 안 보이는 날이 오면 한동안 나를 기억하게 돼?'

 

기억해 주면 또 뭐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