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의 주인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 '내가 떠나면 세상은 어떻게 되나?'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내가 떠나도 저 나무는 당연하다는 듯 저기 저렇게 서 있겠지.'
그럴 때 나는 나무를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느 날 나무는 생각할 것이다.
'한때 그가 이 길을 다녔지. 그의 잠깐을 영원처럼 여겼지.'
나무는 다시 다른 사람이 오가는 걸 보면서 곧 나를 잊을 것이다. 잊진 않을까? 사람은 무엇이든 금세 잊거나 오래 기억하거나 하지만 나무는 기억할 것은 영원히 기억하고, 기억하지 않을 건 아예 염두에 두지 않는지도 모른다.
나무는, 가령 저 밤나무 같으면 어떻게 적어도 150년 혹은 수백 년을 살까?
당연히 할 일이 있겠지? 할 일도 없는데 태어나고 살아 있는 뻔뻔한 존재는 없을 테니까.
잘 자란 참나무 한 그루에는 최대 50만 개의 잎이 달린다. 각각의 잎은 폐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기공stomata'이라는 미세한 구조로 뒤덮여 있다. 이 기공을 통해 이산화탄소가 들어오고 산소가 빠져나간다. 나뭇잎 1제곱밀리미터에는 100개 내지 1,000개의 기공이 있다. 그 모든 기공이 다 함께 지구의 거대한 호흡 체계에 기여하고 있다.
겨울이 되면, 잎이 없는 나무는 호흡기관 대부분을 잃고 조용히 지낸다.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는 갈 곳도 없고 할 일도 없고 누가 집에 데려가지도 않아서 정처 없이 어슬렁거린다. 그러다 6월이 오면 새로 자라난 수십만 개의 푸른 잎이 다시 생기고 이산화탄소로 가득 찬 공기를 완전히 문자 그대로 청소한다. 더 북쪽의 숲으로 갈수록 이산화탄소는 더 특별히 눈에 띈다. 이 같은 청소는 날이 추워질 때까지 계속되다가 11월이 되면 상황이 뒤바뀐다(그리고 계속 반복된다).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가 쓴 《우아한 우주》(프시케의숲, 2022)의 '유월이 만드는 변화'라는 글의 시작 부분이다.
나무는 왜 저렇게 조용히 서 있다가 유월이 되면 푸른 잎을 달게 되는 것일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산소 공장'을 운영하는 것일까?
사람을 위해서?
잠깐만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뻔뻔한 생각이고 내가 나무라 해도 가소로워서 웃음이 날 것 같다. '사람을 위해서라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렇지, 무슨 희생정신을 발휘한다고 사람을 위해 산소를 만들겠는가? 잠깐 사이에 세상을 이 꼴로 만들어 놓는 인간들이 뭐가 좋다고 희생정신까지 발휘하겠는가!
그렇다면 도대체 뭘 위해서지? 어떤 목적에서지?
그건 너무 어려워서 나 같은 사람은 해결할 수가 없는 문제이고, 과학자들은 이상하게도 그런 데는 관심이 없어서 그들의 견해를 부탁할 수도 없다. 과학자들은 나무고 물이고 하늘이고 간에 뭐든 어떻게 하면 씨도 남기지 않고 몽땅 이용할 수 있을까, 거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무는 왜 있을까?" 그런 한가해 보이는 질문은 결국 나도 그냥 놔두는 수밖에 없다.
하기야 저 글을 쓴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라는 여성도 나무들이 마치 자신을 위해서, 사람들을 위해서, 그러니까 인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써놓았다. 저 글에는 이런 문장도 보였다.
우리 지구에는 3조 그루 넘는 나무가 있다. 한 사람이 400그루씩 거느리는 셈이다. 은하수에 있는 별의 수보다 지구상의 나무 개수가 더 많을 것이다. 대륙의 대부분이 북반구에 있으므로 나무도 당연히 그렇다. 이 세상의 온대림은 대부분 캐나다, 시베리아, 스칸디나비아에서 볼 수 있다.
서글픈 일이지만 나로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번에 저 나무에게 가면 좀 조용히 물어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를 어떻게 생각해?'
'나중에 내가 안 보이는 날이 오면 한동안 나를 기억하게 돼?'
기억해 주면 또 뭐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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