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은행나무 아래 그 소녀의 일기장

by 답설재 2021. 3. 8.

 

 

육십여 년 비밀을 지켰네.

철저히 그 비밀을 지켰네.

 

 

#

 

 

추석이 지나고 은행나무잎에 물이 들고 운동회가 다가왔습니다.

운동회 연습 때문에 오후 수업은 없어졌습니다.

그래 봤자 사시사철 아프고 사시사철 일에 지친 우리 엄마는 학교에 올 수도 없는 운동회였습니다.

점심을 굶은 채 운동회 연습에 시달린 오후, 혼자 은행나무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쉬는 시간의 그 운동장에 전교생의 반은 쏟아져 있는데도 거기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

 

 

거기 그 소녀의 까만 가방이 보였습니다. 어른들은 농사를 짓거나 기껏해야 장사를 하는데 그 아이만은 그렇지 않았고 그걸 증명하듯 꽃무늬가 수 놓인 가방을 갖고 다니는 소녀. 요즘의 쇼핑백처럼 학용품을 넣고 꺼내기가 좋은 가방을 들고 다니는 그 소녀.

4교시 후에 선생님이 되돌려준 일기장이 빤히 보였습니다.

 

나는 오늘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갔다.

네 시간 공부를 하고 운동회 연습을 했다.

쉬는 시간에는 아이들과 재미있게 놀았다.

운동회 연습을 다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숙제를 하고 조금 놀다가 저녁 식사를 했다.

.......................

 

 

#

 

 

'이럴 수가!'

무언가 더 적혀 있었겠지만 그래 봤자 별 수 없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날 일기를 읽어보았고 또 다른 날 일기를 읽어보았고 낭패감을 느꼈습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 예쁜 애는 우리와 달라야 하는데?' 싶었지만 며칠치 일기가 같았고, 다른 애들 일기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 확실했습니다. 단정한 글씨? 그건 특별한 건 아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밥 먹고 학교 가는 일 좀 쓰지 말라고 자주 분통을 터뜨렸지만 이 예쁜 아이조차 이렇게 쓰고 있다니...

 

 

#

 

 

'어떻게 살고 있을까?'

수없이 오고 가는 세월 속에서 은행나무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그날 그 일기장을 떠올렸고 그 소녀의 노후를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많은 것들을 가지고 싶었고, 잃어버렸고, 그만큼 많은 것들이 밀려왔다가 거의 그대로 사라져 갔습니다.

그렇지만 그 일기장의 문장들은 변함없이 오롯했습니다. "나는 오늘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갔다......"

 

 

#

 

 

그러면서 육십몇 년이 지났고 마침내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실망스럽기만 하던 그 문장들이 어린 소녀의 아침 얼굴처럼 영롱하게 떠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는 오늘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갔다."

누가 그렇게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게 왜 원망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비록 점심은 굶을지언정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학교 가고, 그런 나날이 우리에겐 얼마나 평온하고 행복한 날들이었습니까?

 

 

육십여 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네.

철저히 함구하여 누설하지 않고 지냈네.

 

 

 

'내가 만난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운 그 다방茶房  (0) 2021.03.13
대화  (0) 2021.03.11
"봄이 폭발했다"  (0) 2021.03.05
바다에서의 죽음  (0) 2021.02.28
TV가 27%밖에 안 되는 거예요  (0) 2021.02.26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