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691

문성란(산문) 「어느 무명 시인에게 배운 것」 시처럼 읽혔다. 잔잔하게 흐르는 물 같은데 긴장감을 느끼게 했다. 의도하지 않았을 듯한 기승전결(起承轉結)이 보이는 것도 신기했다. 떠난 이가 있고 보낸 이가 있고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다. 영영 떠난 이도 보낸 이와 지켜본 이들도 다 행복한 사람들이었다(부러웠다). 지켜본 이 중에는 이 글을 쓴 시인이 있다(늦었겠지, 시인이 아니어도 시인처럼 살아보려고는 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어느 무명 시인에게 배운 것 / 문성란 버스를 기다리면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오래된 습관이다. 티끌 하나 없이 맑은 하늘이 보일 때도 있고, 구름송이를 띄운 하늘이 보일 때도 있고, 더러는 울음을 머금은 것처럼 어둡게 내려앉을 하늘일 때도 있으나 오늘은 빈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시린 하늘이다. 가지에 꽃눈을 움켜쥐.. 2023. 10. 31.
《詩經》 《詩經》 金學主 譯, 明文堂 2010 물수리(關雎) 구욱구욱 물수리는 황하 섬 속에서 우는데, 대장부의 좋은 배필, 아리따운 고운 아가씨 그리네. 올망졸망 마름풀을 이리저리 헤치며 뜯노라니, 아리따운 고운 아가씨, 자나 깨나 그립네. 그리어도 얻지 못해 자나 깨나 생각 노니, 그리움은 가이없어, 밤새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올망졸망 마름풀을 여기저기 가려 뜯노라니, 아리따운 고운 아가씨와 금슬 즐기며 함께하고 싶네. 올망졸망 마름풀을 여기저기 뜯노라니, 아리따운 고운 아가씨와 풍악 울리며 즐기고 싶네. 關關雎鳩 在河之洲 窈窕淑女 君子好逑 參差荇菜 左右流之 窈窕淑女 寤寐求之 求之不得 寤寐思服 悠哉悠哉 輾轉反側 參差荇菜 左右采之 窈窕淑女 琴瑟友之 參差荇菜 左右芼之 窈窕淑女 鐘鼓樂之 옛날에는 '후비(后妃)의 .. 2023. 10. 29.
레이 브래드버리 《화씨 451》 레이 브래드버리 《화씨 451》 박상준 옮김, 황금가지 2009 세속적이고 통속적인 정보만 중요하게 취급되는 축약의 세상, 벽면 TV가 즉각적·말초적 결론을 내려주는 세상, 빠른 속도의 문화에 중독된 사람들이 쾌락만을 추구하는 세상(가까운 미래)... 독서는 비판적인 생각을 갖게 하므로 책을 소지하는 행위는 불법이다. 가이 몬태그는 그 세상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불태우는 직업을 가진 방화수(fireman)다. 자신이 하는 일에 전혀 의문을 가지지 않았던 그는, 세상의 모든 것에 생동감 넘치는 호기심을 가진 옆집 소녀 클라리세 매클린을 만나게 되면서("아저씬 행복하세요?") 자신의 삶이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 소녀 클라리세가 실종되면서 자신의 깨달음에 따른 생각을 실행하게 된다. 파버 교수의.. 2023. 10. 20.
패트릭 터커 《네이키드 퓨처 THE NAKED FUTURE》 패트릭 터커 《네이키드 퓨처 THE NAKED FUTURE》 이은경 옮김, 와이즈베리 2014 메타데이터가 내는 소리를 듣는 주체는 우리와 동떨어진 기업, 시장, 정부 권력이다. 그러나 (...) 벌거벗은 미래에는 모든 이가 이 노래를 들을 수 있다. 데이터는 다른 누구보다도 직접 행동을 통해 창출해 낸 장본인, 바로 당신의 소유이다. 데이터를 부채가 아니라 당신이 소유권을 갖고 사용할 수 있는 자산이라고 생각하라. 벌거벗은 미래에 당신은 스스로 창출한 데이터를 이용해 한층 더 건강한 삶을 누리고 더 적은 시간에 더 많은 목표를 실현하며 불편과 위험을 회피할 수 있을 것이다. 1. 대지를 뒤흔드는 폭군, 거대메기 ˙사물인터넷이 만드는 글로벌 신경계 ˙거짓 정부 발표의 대안, '후쿠시마에 부는 바람' 앱 .. 2023. 10. 17.
위수정(단편소설) 「없음으로」 위수정(단편소설) 「없음으로」 『현대문학』 2023년 10월호 위수정이라는 소설가가 있다. 프로필을 보면 '1977년 부산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2017년 『동아일보』 등단, 소설집 『은의 세계』, 〈김유정작가상〉 수상'으로 되어 있다. 이 단편 말고 전에도 이 작가의 단편을 읽은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순식간에 읽었다. 다 그럴 것 같은 장면들로 이어진다. 평론가들은 평론을 하고 나는 이 소설을 다 옮겨 쓸 수는 없어서 두 군데를 옮겨놓기로 했다. 이 부분을 보면 언제라도 생각날 것 같았다. 화자 세진이는, 애인을 죽여서 뒷마당에 묻은 살인자 세준과 쌍둥이로 태어난 누나다. 누군가 담벼락에 빨간 래커로 낙서를 해놓았다. 사형하라! 나는 급히 대문을 열고 들어가 문을 잠갔다. 전화기를 들고 안절부.. 2023. 10. 15.
제니퍼 아커, 앤디 스미스 《드래곤플라이 이펙트 DRAGONFLY EFFECT》 제니퍼 아커, 앤디 스미스 《드래곤플라이 이펙트 DRAGONFLY EFFECT》 김재연 옮김, 랜덤하우스 2011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라는 말이 있다. 지금도 쓰이고 있는지, 유효한지는 모르겠다. 한번 생긴 말은 언제까지나 존재하는 것일까? 경영학에서는 어떻게 배우고 있을까? 나비 효과라는 말은 신비롭게 다가왔다. '어떤 일이 시작될 때 있었던 아주 작은 변화가 결과에서는 매우 큰 차이를 만들 수 있다는 이론'이라고 한 사전도 있고, ' 어느 한 곳에서 일어난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뉴욕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론'이라고 소개한 사전도 있다.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즈(Lorenz, E. N.)가 주장(사용)한 용어로,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 2023. 10. 7.
알베르 카뮈 《결혼·여름》 알베르 카뮈 《결혼·여름》 김화영 옮김, 책세상 2009 '이 좋은 혹은 아름다운 세상을 두고 어떻게 떠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알베르 카뮈는 에세이 「아리아드네의 돌」을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오랑 사람들은, 임종 때 마지막 시선을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이 대지에 던지며, "창문을 닫아요. 너무 아름다우니."라고 외쳤다는 저 플로베르의 친구를 닮은 것 같아 보인다. 오랑 사람들은 창문을 닫았고 그 속에 갇혔으며, 풍경을 내쫓아버렸다. 한데 르 푸아트뱅은 죽었고, 그 후에도 나날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왔다. 카뮈가 본 세상은 플로베르의 그 친구, 혹은 죽을 때 너무 아름다운 바깥을 내다보지 않으려고 창문을 닫으라고 하는 오랑 사람들의 세상이었다. 오랑은 저의 모래사막도 가졌다. 해변 말.. 2023. 9. 26.
키케로 《노년에 관하여》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노년에 관하여》 천병희 옮김, 숲 2016 2100년쯤 전, 키케로가 노년에 관한 불평을 반박했다. 불평은 다음과 같다. ⊙ 노년에는 큰일을 할 수 없다. ⊙ 노년에는 몸이 쇠약해진다. ⊙ 노년은 거의 모든 쾌락을 앗아간다. ⊙ 노년이 되면 죽을 날이 멀지 않다. 이렇게 반박한다. ⊙ 노년에도 정치 활동과 정신 활동은 물론 농사일을 할 수 있다. ⊙ 체력 저하는 절도 있는 생활로 늦출 수 있으며, 정신 활동을 늘림으로써 체력에서 잃은 것을 보상받을 수 있다. ⊙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 감퇴는 오히려 노년의 큰 축복이다. 그래야만 정신이 제대로 계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쾌락이 모든 행위의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이론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한편 노년에도 정신 .. 2023. 9. 19.
자유자재로 살아가는 신선 '독자(犢子)' 업(鄴) 땅 사람 독자(犢子)는 젊을 때 흑산(黑山)에서 송실(松實)과 복령(茯苓)을 먹었다. 그는 수백 년 동안 어떤 때는 장년으로, 어떤 때는 노년으로, 또 어떤 때는 미남으로, 어떤 때는 추남으로 보여 사람들이 그가 선인임을 알았다. 독자는 늘 양도(陽都)의 주점에 들렀는데, 양도의 딸은 좌우 눈썹이 자라 맞붙고 귀가 가늘고 길어서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겨 "천상의 인물"이라고 했다. 독자가 마침 누런 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주막에 들렀을 때 양도의 딸이 보고 좋아하여 머무르게 하고 받들어 모셨다. 어느 날, 그들은 복숭아와 오얏을 가지러 나갔다가 하룻밤을 자고 돌아왔는데, 그 과일은 껍질까지 달고 맛있었다. 다음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뒤를 밟았지만, 그들이 문을 나서 송아지 귀를 끌고 걸어갔는데.. 2023. 9. 14.
사랑의 전시실·고통의 전시실 '박물관' 하면 '고려시대' '조선시대'... 같은 단어가 떠오르거나 성가신 단어 '13세기' '14세기'... 가 떠오른다. "14세기면 언제야? 몇 년 전이야?"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전시실을 무질서하다고 표현하면서 새로운 개념의 미술관을 제시하고 있다(《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보다 유익한 목록 시스템이 있다면, 우리의 영혼의 관심사에 따라서 장르와 시대를 초월하여 미술 작품들을 한데 모을 수 있을 것이다. (......) 이 미술관을 걸어다니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잘 잊어버리는,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중에서도 가장 본질적이고 삶의 질을 향상시켜주는 중요한 것들을 체계적으로 만나는 경험이 될 것이다. (......) 미술의 목적을 존중하는 맥락에서 바라보면 .. 2023. 9. 1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알레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알레프》 송병선 옮김, 민음사 2012 환상적, 초현실적인 세상을 그린 단편소설집이다. 그런 세상을 사실처럼 그려놓아서 읽는 동안 그 세상에 빠져들게 했다. 출처를 밝히기도 하고 허구의 인물을 역사적인 인물들과 함께 등장시키기도 하고 작가 자신이 알고 있는 실제 인물과 실제로 있었던 일들을 끌어들이니까 이야기 내용이 마치 역사적인 일들처럼 인식되었다. 인상 깊고 재미있다. 「죽지 않는 사람」「죽은 사람」「신학자들」「전사(戰士)와 여자 포로에 관한 이야기」 등 17편 중 「독일 레퀴엠」「신의 글」 두 편을 특히 감명 깊게 읽었다. 그것은 무작위로 선정된 (무작위처럼 보이는) 열네 개 단어로 이루어진 글이다. 내가 그 글을 큰 소리로 말하기만 해도 나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될 수 있다.. 2023. 9. 9.
질투, 인생을 망가뜨리는 피!!! : 미키 기요시 《인생론 노트》 미키 기요시 《인생론 노트》 이성규·임진영 역, 지식공간 2022 질투에 관한 글에서 몸서리가 쳐졌다. 질투가 인생을 망가뜨리는 걸 지켜보고 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렸다. 질투는 피, 피다! 질투는 결코 먼 곳을 볼 수가 없다. 보지 않는다. 질투에 관해 만일 나에게 인간의 성性이 선인 것을 의심케 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마음속 질투의 존재이다. 질투야 말로 베이컨이 말한 것처럼 악마에게 가장 적합한 속성이다. 왜냐하면 질투는 교활하게 어둠 속에서 선한 것을 해하는 것을 향해 기능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어떤 정념도 천진난만하게 나타날 경우, 항상 어떤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질투에는 천진난만이라는 것이 없다. 사랑과 질투는 여러 가지 점에서 닮은 점이 있지만,.. 2023. 9.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