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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689

뭘 알아야 글을 쓸 것 아닌가 글을(도) 쓰며 살아가는 사람은 많다. 나는 그걸 전업으로 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실감할 때가 있다. 유발 하라리의 경우도 좋은 사례다. 그의 책 《사피엔스》는 그 전체가 그런 사례들이어서 밑줄을 긋는다면 아예 다 그어버리면 속이 시원할 정도였다. 소비지상주의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읽으면서도 그 생각을 했다(490~493).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생산량을 늘려야 한다. 상어가 계속 헤엄치지 않으면 질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핍 속에서 살았다. 그러므로 검약이 표어였다. 청교도와 스파르타인의 금욕 윤리는 가장 유명한 두 사례였다. 훌륭한 사람은 사치품을 멀리했고, 음식을 버리지 않았으며, 바지가 찢어지면 새로 사는 것이 아니라 꿰.. 2024. 2. 18.
소설과 소녀(소년)에 관한 존 러스킨의 견해 소설 읽기를 얼마나 허용해야 하는가를 여기서 결정하지는 않겠지만 이것 하나만은 주장하겠습니다. 소설을 읽든 시나 역사물을 읽든 책을 그 효용성으로 골라서는 안 되며 반드시 내용으로 골라야 한다는 점입니다. 영향력이 큰 책 안에 여기저기 붙어 있거나 숨어 있는 위험과 악이 고결한 소녀에게 해를 입히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내용 없는 공허한 저자는 소녀를 우울하게 하고, 그의 쾌활한 어리석음은 소녀의 품격을 떨어뜨립니다. 오래된 고전으로 가득 찬 훌륭한 서가를 이용할 수 있다면 굳이 책을 고를 필요가 없습니다. 요즘 나오는 잡지나 소설은 따님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두십시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고전이 가득한 서고에 따님을 혼자 내버려 두십시오. 자신에게 이로운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게 될 겁니다... 2024. 2. 15.
시몬 드 보부아르 《아주 편안한 죽음》 시몬 드 보부아르 《아주 편안한 죽음》 강초롱 옮김, 을유문화사 2021 죽음은 누구에게나 가장 무거운 숙제라고 할 수 있겠지? 그렇지 않은 척해봐야 별 수 없겠지. 시몬 드 보부아르와 그녀의 어머니는 서로를 부정해 온 사이였다. 딸이 사르트르와 계약결혼을 했으니(그것만도 아니긴 했지만) 그럴 수밖에. 어머니는 그랬겠지. "우리 집안에서 계약결혼이라니! 말이 돼?" 그러나 시몬 드 보부아르가 죽어가는 어머니를 지켜보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된다. 아주 편안한 죽음? 그런 죽음이 있을까 싶진 않고 죽음의 순간에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을 확인할 수 있을 때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 아닐까 싶다. 물리치료사가 침대로 다가와 이불을 걷어 올리고는 엄마의 왼쪽 다리를 붙잡.. 2024. 2. 14.
노발리스 《파란꽃》 노발리스 Heinrich von Ofterdingen 《파란꽃》 김주연 옮김, 열림원 2020 특이한 소설이다. 낭만주의를 열고 교양소설 혹은 성장소설의 효시가 되었다고 한다. 줄거리 부분을 발췌해 보았다(이렇게 하는 건 처음이다). 하인리히는 파란꽃 꿈을 꾼다. 그 꽃 한가운데에 아름다운 처녀의 얼굴이 나타나 미소 짓는다. 그 모습은 하인리히에게 행복에 가득 찬 미래를 약속하는 듯했다. 하인리히는 그 처녀를 찾아 길을 떠난다. 세상은 다양하고 거칠었다. 상인, 군인도 만나고,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은둔자도 만났다. 모든 것이 새로움, 찬탄과 경이의 대상이었다. 그 편력을 통해서 하인리히는 그때까지의 온실 속과 같은 성장 과정에서 벗어나 갖가지 체험을 쌓아 간다. 그것은 한 인간으로서의 발전 과정이었다.. 2024. 2. 12.
임선우(단편) 「프랑스식 냄비 요리」 임선우(소설) 「프랑스식 냄비 요리」 『현대문학』2024년 2월호 놀라운 이야기꾼을 발견했다. 한때는 단이 내 곁에서 먼저 잠들어버리면, 단의 잠 속으로 따라 들어가고 싶었다. 눈을 감으면 드러나는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단의 꿈에 잠입하고 싶었다. 단의 무의식 속 풍경을 훔쳐보고, 그 안에서 하룻밤을 꼬박 살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이면 단을 더욱 잘 이해하는 사람으로 눈을 뜨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시인이 된 단은, 호텔 베이커리에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 '나'의 첫 연인이었고 6년을 함께했는데 그 단이 어느 날 수영장 물에 흐물흐물 녹아버렸다. 단이 눈앞에서 녹아내렸을 때는 왜? 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왜? 왜? 왜 지금 이 시점에 녹아버린 건데? 수영장 한 달 이용권을.. 2024. 2. 6.
'이야기'의 대가 헤로도토스 매일 아침 수많은 것들이 방송, 인터넷, 신문 등으로 전해지지만 기억의 창고에 들어가지 않는 건 무엇 때문일까? 《서사의 위기》라는 책을 보면, 그런 일들이 이야기가 아니라 정보에 사용되기 때문이란다. 그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벤야민은 역사가 헤로도토스 Herodotos를 이야기의 대가로 예찬했다. 헤로도토스의 이야기하기 예술을 잘 나타내는 예로, 사메니투스 왕 일화가 있다. 이집트의 왕 사메니투스가 페르시아 왕 캄비네스에게 패배해 붙잡혔을 때, 페르시아의 개선 행진을 억지로 지켜봐야 하는 굴욕을 당했다. 붙잡힌 자기 딸이 하녀가 되어 지나가는 광경도 목도해야만 했다. 길가에 서 있는 모든 이집트인이 슬피 우는 동안 사메니투스 왕은 아무 말도 없이 눈을 바닥에 고정한 채 가만히 서 있기만.. 2024. 2. 2.
글을 쓴다는 것 : 존 러스킨의 사고 존 러스킨은 《건축의 일곱 등불》이라는 책의 두 번째 장 「진실의 등불 The Lamp of Truth」을 이렇게 시작했다. 인간의 덕德과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지구의 개명開明, enlightenment 사이에는 닮은 점이 있다. 영역의 경계에 다가갈수록 점차 활력이 떨어지고, 두 요소 대립으로 인한 근본적인 분리가 일어난다는 점이다. 바로 해질녘의 어스름과 같이 빛과 어둠이 만날 때이다. 세상이 밤으로 말려 들어가는 그곳, 선보다는 넓은 띠와 같은 그것이 덕의 묘한 어스름이다. 어둑어둑해서 분간이 되지 않는 땅, 그곳에서 열정은 조급함이 되고, 절제는 가혹함이 되며, 정의는 잔인함이 되고, 믿음은 맹신이 된다. 그리고 제각기 어둠의 그늘로 모습을 감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차 침침함이 더해지면, 우리.. 2024. 1. 30.
김원길 편저 《안동의 해학》 김원길 편저 《안동의 해학》 지례예술촌 2012 해와 달 선비 한 사람이 해질녘에 어느 시골 동네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떠꺼머리총각 둘이 신작로 복판에서 왁자지껄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선비가 가까이 가자 "자, 그럼 우리 저 사람한테 물어보자." 하는 것이다. "보래요, 우리가 내기를 했는데요. 저기 저 하늘에 떠 있는 게 해이껴, 달이껴?" 서녘 하늘엔 둥근 해가 지고 있었는데 유난히 크고 벌개서 달 비슷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보름달이 서쪽에서 뜰 리가 없지 않은가! 순간 장난기가 동한 이 선비는 두 총각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왈, "글쎄, 나는 이 동네에 안 살아 봐서 잘 모르겠네." '숙맥열전(菽麥列傳)' 중 한 편이다. 이런 이야기 109편이 안동을 위한 변명, 숙맥열전, 개화백태, 안동 그 낯선 .. 2024. 1. 29.
노년은 슬프다(시몬 드 보부아르) 시몬 드 보부아르는 방대한 저서《노년》에서 노인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제1부 외부에서 본 노년 제1장 노화와 생물학 제2장 민족학적 자료들 제3장 역사 사회에서의 노년 제4장 현대 사회에서의 노년 제2부 세계 속의 존재 제5장 노년의 발견과 수락 : 육체의 산 경험 제6장 시간, 활동, 역사 제7장 노년의 일상생활 제8장 노년의 실례들 결론 아래는 제7장 '노년과 일상생활' 중에서 발췌해 본 문장들이다. 노년은 비참하고 슬프다. 누가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 말은 위안이 되지 않는다. 노년은 슬프고 비참하다. 어쩔 수 없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결론에서 그 비참함, 슬픔을 극복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 책의 부제도 "나이듦의 의미와 그 위대함"이다. 나는 그 결론, 부제를 보면서도, 노년은 .. 2024. 1. 22.
글을 쓴다는 것 : 멋있는 유발 하라리 과학은 자연선택으로 빚어진 유기적 생명의 시대를 지적설계에 의해 빚어진 비유기적 생명의 시대로 대체하는 중이다. 특히 오늘날의 과학은 우리에게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재설계할 수단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역사 과정 동안 수많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혁명이 존재했지만 인간 그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신라시대나 고대 이집트 시대 선조들과 여전히 동일한 몸과 마음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사회와 경제뿐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도 유전공학, 나노 기술, 뇌기계 인터페이스에 의해 완전히 바뀔 것이다. 몸과 마음은 21세기 경제의 주요한 생산물이 될 것이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서문을 읽으며 아득한 느낌이었다. 독후감을 쓰기가 어려울 것 같은 절망 같은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흥분하지.. 2024. 1. 20.
존 러스킨, 마르셀 프루스트 《참깨와 백합 그리고 독서에 관하여》(2) 존 러스킨, 마르셀 프루스트 《참깨와 백합 그리고 독서에 관하여》 유정화, 이봉지 옮김, 민음사 2018 존 러스킨의 견해(예) 존 러스킨의 강연은 95개 절(節)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은 그중 한 절이다 25. (...) 축어적 검토야말로 독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세와 표현을 세세히 살피고 항상 저자의 입장에서 보며, 우리 개성을 지우고 저자의 입장이 되어 밀턴을 오독하면서 "나는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밀턴이 이렇게 생각했군요."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거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여러분은 다른 책을 읽을 때도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라는 것에 점차 무게를 두지 않게 될 겁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그다지 심각하게 중요하지은 않다는 사실, 그리고 어느 주제에 대한 여러분.. 2024. 1. 15.
존 러스킨, 마르셀 프루스트 《참깨와 백합 그리고 독서에 관하여》 존 러스킨, 마르셀 프루스트 《참깨와 백합 그리고 독서에 관하여》 유정화, 이봉지 옮김, 민음사 2018 1 독서란 어떤 것인지, 존 러스킨과 마르셀 프루스트의 견해가 극명하다. 「참깨: 왕들의 보물」「백합: 여왕들의 화원」은 남성(왕)과 여성(여왕)을 대상으로 한 존 러스킨의 강연집이고 「독서에 관하여」는 마르셀 프루스트가 존 러스킨의 강연 내용을 보고 반박한 내용으로 두 가지 다 흥미로웠다. 러스킨은 독서가 인생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독서 관행, 책의 가치와 특징, 독서법, 교육의 목적과 의무, 여성 교육, 가정과 사회에서의 여성의 역할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확고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는 책 자체의 내용, 단어의 정확한 의미 파악과 사용 등을 국민 교육의 입장에서 강조했다. 2.. 2024. 1.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