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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689

세이 쇼나곤 / 새벽에 헤어지는 법 새벽녘 여자네 집에서 돌아가는 남자는, 너무 복장을 단정히 하거나 에보시 끈을 꽉 묶지 않는 것이 좋다. 옷차림이 조금 흐트러졌다고 해서 누가 흉을 보겠는가? 밤을 같이 보내고 새벽이 가까워 오면 남자는 자리에 누운 채 일어나기 싫다는 듯이 우물쭈물하고 있어야 한다. 여자가 "날이 다 밝았어요. 다른 사람 눈에 띄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하는 재촉을 듣고서야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 앉는다. 일어나 앉아서도 바로 사시누키를 입으면 안 되고 한동안 우두커니 앉아 생각에 잠긴 듯이 있다가 귓속말로 밤에 있던 일을 속삭이며 슬그머니 속곳 끈을 묶고 일어서야 한다. 격자문을 밀어 올리고 쪽문까지 여자와 함께 가면서 낮 동안에 못 보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다시 한 번 귓속말로 속삭인다. 그런 식으로 해서.. 2024. 3. 19.
향기로운 구익부인 제(齊) 나라 구익부인(鉤翼夫人) 조(趙)씨는 아리땁고 가녀린 미인으로 청정함을 좋아했는데 6년 동안 앓아누운 뒤 오른쪽 손이 오그라들었고 음식도 조금밖에 먹지 못했다. 그때 망기술사(望氣術師)가 "동북에 귀인의 기운이 있다"고 해서 조정에서 수소문하여 그녀를 찾아냈다. 무제(武帝)가 그녀의 손을 펴보았더니 옥으로 만든 대구(帶鉤) 하나가 들어 있었고 오그라졌던 그 손이 저절로 펴졌다. 무제가 그녀를 총애하여 소제(昭帝)를 낳았지만 나중에는 권력 문제로 그녀를 살해하고 말았는데 입관한 시체가 차가워지지 않고 한 달 동안 향기가 났다. 마침내 소제가 즉위하여 다시 그녀를 매장하려 했지만 관 속에는 명주 신발만 남아 있었다. 신선 이야기 《열선전 列仙傳》에서 봤습니다(유향 지음, 김장환 옮김, 지식을만드는지.. 2024. 3. 17.
알렉스 펜틀런드 《창조적인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알렉스 펜틀런드 《창조적인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SOCIAL PHYSICS 빅데이터와 사회물리학 박세연 옮김, 와이즈베리 2015 제때 읽었어야 할 책을 '느긋하게' 읽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읽었다. '세상의 변화는 급격하다'는 말을 실감했다. 2015년에 읽었다면 '무슨 소리지?' '정말 그럴까?' 했을 부분을 전문지식이라고는 서푼이 되지 않는데도 '그렇지!' '그렇지!' 하며 읽었다. 사회물리학(SOCIAL PHYSICS)? "전통적인 물리학의 목표가 에너지 흐름이 어떻게 운동 변화로 이어지는지를 이해하는 학문이듯이, 사회물리학은 아이디어 흐름 idea flow이 어떻게 행동 변화로 이어지는지를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이란다(11). '전통적인 물리학'? 물리학이겠지? 저자는 이렇게 정의.. 2024. 3. 15.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황문수 옮김, 문예출판사 2023 사랑의 기술에 대한 편리한 지침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실망할 것이다. 사랑은 스스로 도달한 성숙도와는 관계없이 누구나 쉽게 탐닉할 수 있는 감상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이 이 책의 의도이기 때문이다. 이건 머리말 첫 문단이다. 다음은 본문 첫머리 두 문단이다. 사랑은 기술인가? 기술이라면 사랑에는 지식과 노력이 요구된다. 혹은 사랑은 우연한 기회에 경험하게 되는, 다시 말하면 행운만 있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즐거운 감정인가? 이 작은 책은 '사랑은 기술이다'라는 견해를 전제로 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물론 사랑은 즐거운 감정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인이 사랑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 2024. 3. 8.
수렵채취인의 즐거움, 농부·사무원의 고생 초·중·고, 대학을 다니며 이 그림을 몇 번이나 보았을까? 교육부에서 초·중·고 교과서를 만들고 검열하면서 본 것은 몇 번이었을까? 어떤 설명을 보았을까? 인류(인간)는 아득한 옛날부터 농사를 지어왔다는 것? 고대문명이 일어난 이집트에서의 이 농사 그림은 그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것? 그렇지만 《사피엔스》(유발 하리리)에서 "농업혁명은 인류가 당한 역사상 가장 큰 사기였다"는 글에서 이 그림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기원전 1200년경 이집트 무덤의 벽화. 황소 두 마리가 밭을 갈고 있다. 야생 소는 복잡한 사회구조를 갖춘 무리를 이루어 자기들 마음대로 돌아다닌다. 가축화되고 거세된 수소는 채찍질을 당하거나 좁은 우리에 갇혀서 삶을 낭비한다. 소는 자신의 신체에도, 사회적, 감.. 2024. 3. 7.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조현욱 옮김, 김영사 2016 교과서에서 배우기로는 '인류의 역사'라는 게 그리 흥미롭질 못했는데, 이 책에서는 일어난 일마다 특이하고 다채롭다. 과목으로 치면 세계사일 것인데 이렇게 재미있는 공부라면 기꺼이 세계사를 전공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세계사 선생 유발 하라리를 그리워하며 읽었다.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는 어떤 곳일까? 유발 하라리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학생들은 그를 좋아할까?....... 교과서로 치면 단원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인지혁명 2. 농업혁명 3. 인류의 통합 4. 과학혁명 인지혁명은 인간들이 똑똑해진 시기다. 농업혁명은 자연을 길들여 인간이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된, 혹은 오히려 인간이 자연에 길들여진 시기, 과학혁명은 인간들이 스스로 주체.. 2024. 3. 5.
세이 쇼나곤 / 은밀한 곳의 멋 사람 눈을 피해 간 곳에서는 여름이 가장 운치 있다. 밤이 짧은 탓에 한숨도 못 자고 새벽을 맞이하노라면, 어느덧 뿌옇게 동이 터 오면서 주위가 서늘해지는 느낌이다. 밤새 하던 얘기를 이어 가고 있으면 파드득하고 머리 위로 까마귀가 갑자기 높이 날아올라, 혹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들키는 것은 아닐까 하고 가슴이 마구 뛴다. 또한 겨울밤 아주 추울 때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덮은 옷 속에 파묻혀, 저 멀리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종소리를 함께 듣는 것도 정취가 있다. 그 즈음 닭이 울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부리를 날개 속에 처벅아 먼 곳에서 우는 것처럼 들리다가, 날이 밝아 옴에 따라 점점 가깝게 들려온다. 은밀했던 그 순간이 산뜻한 새벽별이 보이는 수채화가 되었다. 1000여 년 전 헤이안 시대의 궁중 여인(여.. 2024. 3. 2.
"인간은 필요 없다!" 우리를 더 잘 살게 해주려고 애쓰는 과학자들은, 지금 우리를 어떤 세상으로 데려가고 있는 것일까? 인조지능이 인간을 '노예화'하게 될까? 그럴 가능성은 적다. 그보다는 우리가 동물을 키우듯 인간을 키우거나, 내부 환경을 쾌적하고 편리하게 조성해서 경계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거의 들지 않게 만들고 그 안에 격리 보호할 가능성이 크다. 인간과 인조지능이 동일한 자원을 놓고 경쟁하지는 않기 때문에, 인조지능들은 지렁이나 선충을 대하듯 우리를 완전히 무관심하게 대하거나, 우리가 반려동물을 대하듯 온정적으로 대할 것이다. (...) 지구는 햇빛과 고독만이 존재하는 유리 사육장에, 모두의 이익을 위해 우리가 맞아들였던 기계 경호원들이 가끔씩 끼어들어 모두 순조롭게 돌아가는지 살피는, 벽과 담장 없는 동물원이 .. 2024. 2. 29.
시몬 드 보부아르의 결론 《노년》 《노년》 그 방대한 책에서 노년의 슬픔을 조목조목 파헤치고 나열한 보부아르는 짤막한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만 보부아르는 결론에서도 결국 노년의 슬픔을 요약해서 제시하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인간들은 노년을 슬프게 혹은 반항적으로 맞아들인다. 노년은 죽음 자체보다 더 큰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우리가 삶에 대립시켜야 하는 것은 죽음보다 차라리 노년이다. 노년은 죽음의 풍자적 모방이다. 죽음은 삶을 운명으로 변화시킨다. 어느 면에서 죽음은 삶에 절대의 차원을 부여함으로써 삶을 구원한다. 현재의 과거에 대한 우위는─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 그렇지만─현재가 과거에 있었던 것의 쇠퇴나 혹은 과거의 부인인 경우 특히 슬픈 것이다. 옛 사건들, 예전에 획득한 지식들은 생명의 불이 꺼진 삶 속에서 자기 자리를 지.. 2024. 2. 28.
"목목문왕(穆穆文王)이여" 음담패설을 유난히 밝히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여겨서 무모하게, 서슴없이 해버리기도 한다. 모처럼 남녀 동기회 모임에 나간 적이 있다. 퇴임들을 했기 때문에 참석자가 많았다. 1박 2일간의 프로그램을 끝내고 점심식사도 거의 끝나서 곧 헤어질 시간이었고, 다음에는 또 언제 이 얼굴들을 볼 수 있을지 숙연하여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분위기였는데 학교 다닐 땐 말도 없이 겨우 얼굴을 들고 다니던 사람이 큰 소리로 음담패설을 해버렸다. 모두들 껄껄 웃었고 여성들도 그렇게 웃거나 두어 명은 소리없는 미소를 지었다. 개그나 해학이 아니었다. 저속하기 짝이 없어서 이후 그 음담패설이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40여 년 만에 처음 만났지만 아마 교직생활을 하는 내내 그의 행동은 저속했을 것이라는 짐작을.. 2024. 2. 25.
어떤 유언 가난에다 흉년마저 겹쳐 마당쇠를 내보낸 늙은 선비가 손수 땔감을 구하러 톱을 들고 나무에 기어올랐다. 글만 읽고 나무라곤 해보지 않은 이 선비, 욕심은 있어서 굵은 나뭇가지를 골라 베는데 걸터앉은 가지의 안쪽을 설겅설겅 톱질한 것이다. 떨어질밖에.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돈이 없어서 의원도 못 부른 채 저절로 낫기만 기다리다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머리맡에 둘러앉아 임종을 지켜보던 자서제질(子胥弟姪)에게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내 말을 명심, 또 명심해야 하느니라. 혹여 나무를 베더라도 제 앉은 가질랑은 절대로 베어선 안 되느니라. 알아들었느냐?" [출처 : 지례마을] 군소리 고금에 유언치고 이보다 더 교훈적인 것도 드물 줄 안다. 세상 살며 제일 조심하고 삼갈 것이 바로 '제 앉은 가.. 2024. 2. 22.
가와바타 야스나리 《잠자는 미녀》 가와바타 야스나리 《잠자는 미녀》 정향재 옮김, 현대문학 2009 잠자는 미녀의 집은 파도가 밀려와 부딪히는 절벽 위 숲 속에 있었다. 짓궂은 장난일랑 하지 말아주세요. 잠들어 있는 아가씨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으신다거나 하는 것도 안 돼요. 아가씨를 깨우려 하지 말아주세요. 아무리 깨우려고 하셔도 결코 깨지 않을 테니까요. 아가씨는 깊이 잠들어 있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관리하는 여자가 제시하는 규칙이다. '안심할 수 있는 손님'만 출입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여자를 여자로서 다룰 수 없는 노인들이 올 수 있다는 의미이다. 67세의 에구치는 다섯 차례에 걸쳐 그 집을 찾아간다. 잠자는 미녀를 바라보고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면서 그동안 그가 만난 여성들, 여성의 아름다움, 자신의 막내딸의 일들을 회상한다... 2024. 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