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꼬엔 《주군의 여인 1》
윤진 옮김, 창비 2018
스위스 호반도시 주네브의 국제연맹 사무차장 쏠랄, 젊고 키가 크고 잘 생기고 직위가 높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유대인 쏠랄은 뭇 여자들이 사랑을 퍼붓는 동쥐앙이지만 그는 자신의 외모와 직위 같은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절대적인 사랑을 꿈꾸며 파티에서 만난 부하직원의 부인에게 첫눈에 반한다.
그 '아름다운 여인'은 주네브 명망가(家) 출신 유부녀 아리안 도블이고, 무능하고 천박하면서 출세만을 꿈꾸는 범속하기 이를 데 없는 국제연맹 B급 직원 아드리앵 됨이 그녀의 남편이다.
쏠랄의 절대적인 사랑에 대한 꿈은 그에게 모든 일, 모든 여자에 대한 경멸감을 품게 한다. 아름다운 여인 아리안에게도 그렇게 접근하다가, 그녀의 남편 아드리앵을 A급 직원으로 승진시켜 흡족한 마음으로 해외 장기 출장을 가게 하면서 두 사람은 헤어날 길 없는 사랑의 열락에 빠진다.
떠나요, 우리 둘이, 라고 말하며 그녀는 기사의 어깨에 고개를 얹었고, 두 사람은 그렇게 천천히 돌며 춤을 추었다. 어디로 가고 싶소? 그가 물었다. 멀리, 그녀가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태어난 곳으로 가겠소? 이 사람이 태어난 곳, 그녀가 행복을 그려보며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당신이 태어나서 다행이에요. 언제 떠날까요, 우리 둘이? 그녀가 물었다. 오늘 아침, 그가 말했다. 비행기에 우리 둘만 타고 오후면 당신과 나는 케팔로니아에 가 있을 거요. 그녀가 눈까풀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고 기적을 바라보았다. 오늘 오후면 손을 잡고 바다를 바라보리라, 그녀는 숨을 들이마셨고, 바다 냄새와 바다가 풍기는 삶의 냄새를 맡았다. 사랑에 취해 함께 바다로 떠나기,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도피처에 고개를 기댔고, 빙글빙글 돌며 미소를 지었다.
아내가 그 쾌락의 골짜기에 빠져들고 있는데 아드리앵은 하늘을 나는 기분으로 먼 나라를 향해 떠나고 있다.
공식 출장이라니, 세상에. 별도 수당이 나오고, 세상에, 기후 수당까지, 세상에, 이제 곧 조르주 쌩끄 호텔이라니, 세상에, 외교관 지위라니, 세상에. 빠리에 도착하는 대로 전화를 걸어 당부를 해야지, 가스 잠그고 빗장 걸고 덧창 닫고 비타민 먹고 등등, 아니 도착하자마자 전화하는 건 안된다, 자고 있는 걸 깨울지도 모른다. 그래, 11시까지 기다리자, 그리고 편지를 써서 한번 더 당부하자. 종이 한 장에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써서 번호를 매기고 빨간색 밑줄을 긋고 표로 만들어서 방에 붙여놓으라고 하자. 아니면 마리에뜨가 올 때까지 괜찮은 호텔에, 리츠 같은 데 가서 지내라고 할까. 비싸긴 하지만 할 수 없지. 그러면 혼자 집에 있지 않아도 뵈고 빗장 거는 걸 잊을 염려도 없다. 아니, 리츠는 안된다, 차장을 만날 수도 있는데, 안 그래도 탐탁지 않아 하는데 괜히 마주쳤다가 인사도 안 할지 모른다.
차장과 아내의 입맞춤은 한없이 잦고 길어서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그 행위를 읽는 것이 낯 뜨겁진 않다. 사랑에 탐닉하면서도 쏠랄은 인간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경멸감을 느낀다. 사이에 육체는 시들고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와 책을 읽는 나 사이에 짙은 우수(憂愁)가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아리안을 만나기 전에 탐닉했던 여인과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우수는 절정에 이른다.
주변 인물들이 보여주는 증오, 비방, 음모, 모함, 질시, 가식 같은, 인간사회가 감추고 싶은 부분들을 날카롭고 잔인하게 파헤치는 장면들도 흥미롭다.
아리안의 시어머니 앙뚜아네뜨를 중심으로 폭로되는 신앙의 허위, 시아버지가 보여주는 남자의 비굴함과 굴종, 품위와 권위와 허위에 대한 풍자, 국제연맹 속에서 벌어지는 외교 무대에서의 무능과 위선... 코미디처럼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인간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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