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여행의 책』에서 불운과의 싸움, 죽음과의 싸움을 이야기한다. 그는 그 싸움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을 이야기한 건 아닌 것 같았다. 불운과의 싸움, 죽음과의 싸움의 가치, 그 싸움에서 순응하고 패배하는 태도를 이야기한 것 같았다.
불운과 싸우기
(......)
불운은 그대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고
그대를 발전시킨다.
불운 앞에서 그대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몸을 옹그리면서
불운이 그대 위로 미끄러져 내리는 것을 느껴라.
이번만큼은 싸움을 자제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전사다.
진정한 전사는 질 줄도 알아야 한다.
그대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실패도 반드시 경험해야 한다.
죽음과 싸우기
여섯 번째 적은 죽음이다.
신화에 나오는 것처럼, 바로 그 적이
찢어진 외투를 걸친 해골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적은 살 썩는 냄새를 풍기며
녹이 슨 커다란 낫을 흔들고 있다.
외투에 달린 두건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눈구멍이 휑하게 뚫린 머리뼈를 언뜻 본 것만으로도
그대의 피가 얼어붙는 듯하다.
죽음이 귀에 거슬리는 새된 음성으로
그대에게 말을 걸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치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즈음의 세태를 보면,
새로운 세대는 그 <의례>에서 면제된 것처럼
믿게 하는 경향이 있다.
죽음이라는 말조차도 금기가 되는 풍조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예전에는 노인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손자 손녀들이 할아버지가 늙고 쇠약해져 가는
긴 과정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노인이 병원으로 떠나고 나면,
전화가 와서 <끝났다>고 알리는 날까지
할아버지를 더 이상 보지 못한다.
끝나기는 무엇이 끝났단 말인가?
상속인들의 오랜 기다림이 끝났다는 것인가?
아니면, 노인이 편찮으시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늘 가슴 한구석을 짓누르던 스트레스가?
아니면, 병원 입원비의 부담이?
어쨌거나, 세태가 그렇게 달라짐으로써,
이젠 죽음이 무엇인지를 아무도 모르게 되었고,
죽음이 임박하면 그 거대한 미지의 것 앞에서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또, 영상 매체가 잔혹한 살육 장면을
끊임없이 보여 준 탓에,
사람들은 스스로가 죽음에 무감각해졌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 용기일 뿐이다.
사람들은 죽음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고
노력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죽음이라는 적을 길들이지는 못한다.(......) (98~100)
이렇게 생각하면 될까?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죽음과의 싸움에서는 단 한 명도 그 의례에서 면제될 수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죽음의 과정을 지켜볼 수 있어야 하고, 지켜보아야 한다.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불식해야 한다.
죽음을 실감하며 살아야 한다.
죽음이라는 적을 알고 순응해야 한다.
그가 다 가르쳐 줄 수는 없겠지.
그도 죽어본 적은 없으니까 내가 가보는 수밖에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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