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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by 답설재 2025. 1. 10.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조석현 옮김, 알마 2016

 

 

 

 

 

 

 

의사가 장갑을 들어올리며 뭐냐고 묻는다.

P 선생이 대답한다. "조사해봐도 되겠습니까?"

"표면이 단절되지 않고 하나로 이어져 있어요. 주름이 잡혀 있군요. 음, 또 주머니가 다섯 개 달려 있는 것 같군요. 음, 말하자면..."

"맞습니다. 설명을 하셨으니 이제 그게 뭔지 말해보세요."

"뭔가를 넣는 물건인가요?"

"그래요. 그런데 뭘 넣는 거죠?"

"안에다 뭔가를 넣는 거겠죠." "여러 가지가 가능할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잔돈주머니일 수도 있겠군요. 크기가 다른 다섯 가지 동전을 집어넣는... 아니 어쩌면..."

 

P 선생의 뇌는 기계처럼 정확하게 기능했다. 시각 세계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면에서 그는 컴퓨터와 똑같았다. 더 놀라운 점은 그가 중요한 특징이나 도식적인 연관관계를 토대로 컴퓨터와 똑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해 낸다는 것이었다. 얼굴의 부분을 그린 그림 세트를 이용해 범인의 몽타주를 만들 때처럼, 그러한 도식은 현실과 전혀 대응하지 (...) (36~37 발췌)

 

P 선생은 뛰어난 성악가로 명성을 날렸으나 음악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목소리를 듣는 등 특징을 파악해서 그게 누군지 알아차리는 일이 벌어졌다.

P 선생은 의사(올리버 색스)를 만나고 돌아갈 때 아내의 얼굴이 자신의 모자인 줄 알고 다가가는 장면을 연출한 것이었다.

 

이 책에는 스물네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고, 각 이야기마다 기이하게 보일 수 있는 환자들이 등장한다.

 

"우리 아버지처럼 늙어 보이는 당신이 내 형이라고요? 농담하지 마세요. 우리 형은 젊다고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는데요." 20년 만에 만난 형에게 그렇게 말할 정도로 몇십 년간의 기억을 완전히 잃어버린 코르사코프 증후군(기억 결손) 환자

몸이 없어졌다는 느낌 때문에 눈으로 보고 움직여야 하는 사람

편마비가 된 다리를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느끼는 사람

감각은 살아 있는데도 지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

 환각 환자,

파킨슨 병으로 속귀감각, 고유감각, 시각의 통합이 깨어져 자신의 몸이 기울어지는 줄도 모르는 노인

중풍으로 왼쪽을 볼 수가 없어 오른쪽 접시의 음식만 먹는 중년

 언어의 표정(얼굴 표정, 몸짓, 태도)으로 의미를 간파하는 언어상실증 환자 (이상 '상실')

 

상대방의 신분, 좌우 등 모든 것을 구분하지 않고 균일화해버리는 사람

 지나가는 사람을 순식간에 흉내내는 슈퍼투렛 증후군 (이상 '과잉')

 

회상을 담당하는 관자엽 발작으로 귀에서 노랫소리가 들리는 양로원의 부인

종양수술 처방으로 유발된 음악간질 환자

마약 치료 후 극도로 예민해진 후각(원시감각) 환자

pcp 복용으로 몽롱한 상태에서 살인을 저지른 사람, 관자엽 발작으로 그 살인을 기억해 낸 사람

 편두통으로 환영을 보는 수녀 (이상 '과거로의 이행' '회상' '꿈')

 

혼자서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결함 투성이인데도 시 속의 감정, 비유와 상징은 모두 이해하는 젊은이

파킨슨 병에 걸린 지적장애인 : 오페라 2000곡, 그 오페라의 가수, 스텝들을 모두 기억하고 전 9권(6000쪽)의 그로브   음악을 몽땅 기억하는 61세의 남성

쏟아진 성냥알이 몇 개인지 즉시 알아맞히고, 무엇이든 경험한 것은 모두 기억하지만, 기초적 계산도 못하고 수를 도상으로 파악하는 지능지수 60인 백치천재 쌍둥이 청년들

그림을 잘 그리고 자연에 심취하는 2차적 자폐증의 젊은 화가 (이상 '단순함의 세계')

 

올리버 색스는 이 체험의 기록을 인간성과 그 영혼을 보는 따듯한 눈으로 일관한다.

그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형식적 훈련을 통한 고도의 체계적인 기술 트레이닝도 중요하지만 친밀하고 마음이 서로 잘 통하는 관계가 필요함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C. C. 파크(《나디아론》1978의 저자)의 논문 마지막 부분을 인용했다.

 

성공의 비밀은 좀더 특별한 곳에 있다. 모츠기는 이 지능 낮은 예술가를 집으로 데려와서 함께 살기로 했다. 상대를 위해서 몸을 내던지는 헌신, 비밀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모츠기는 이렇게 말했다.

"야나무라의 재능을 키우기 위해서 내가 한 일은, 그의 영혼을 내 영혼으로 여기는 일이었다. 교사는 아름답고 순수한 뒤처진 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정제된 세계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

 

올리버 색스는 어떻게 하여 그런 가슴과 눈을 지닐 수 있었을까?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어떤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 자신이 어떤 핸디캡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스스로 자신도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더 따뜻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는 그 누구보다 미개인, 어린아이의 마음을 동경하면서 지적장애인들을 사랑하다가 세상을 떠난 의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