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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744

'이야기'의 대가 헤로도토스 매일 아침 수많은 것들이 방송, 인터넷, 신문 등으로 전해지지만 기억의 창고에 들어가지 않는 건 무엇 때문일까? 《서사의 위기》라는 책을 보면, 그런 일들이 이야기가 아니라 정보에 사용되기 때문이란다. 그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벤야민은 역사가 헤로도토스 Herodotos를 이야기의 대가로 예찬했다. 헤로도토스의 이야기하기 예술을 잘 나타내는 예로, 사메니투스 왕 일화가 있다. 이집트의 왕 사메니투스가 페르시아 왕 캄비네스에게 패배해 붙잡혔을 때, 페르시아의 개선 행진을 억지로 지켜봐야 하는 굴욕을 당했다. 붙잡힌 자기 딸이 하녀가 되어 지나가는 광경도 목도해야만 했다. 길가에 서 있는 모든 이집트인이 슬피 우는 동안 사메니투스 왕은 아무 말도 없이 눈을 바닥에 고정한 채 가만히 서 있기만.. 2024. 2. 2.
글을 쓴다는 것 : 존 러스킨의 사고 존 러스킨은 《건축의 일곱 등불》이라는 책의 두 번째 장 「진실의 등불 The Lamp of Truth」을 이렇게 시작했다. 인간의 덕德과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지구의 개명開明, enlightenment 사이에는 닮은 점이 있다. 영역의 경계에 다가갈수록 점차 활력이 떨어지고, 두 요소 대립으로 인한 근본적인 분리가 일어난다는 점이다. 바로 해질녘의 어스름과 같이 빛과 어둠이 만날 때이다. 세상이 밤으로 말려 들어가는 그곳, 선보다는 넓은 띠와 같은 그것이 덕의 묘한 어스름이다. 어둑어둑해서 분간이 되지 않는 땅, 그곳에서 열정은 조급함이 되고, 절제는 가혹함이 되며, 정의는 잔인함이 되고, 믿음은 맹신이 된다. 그리고 제각기 어둠의 그늘로 모습을 감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차 침침함이 더해지면, 우리.. 2024. 1. 30.
김원길 편저 《안동의 해학》 김원길 편저 《안동의 해학》 지례예술촌 2012 해와 달 선비 한 사람이 해질녘에 어느 시골 동네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떠꺼머리총각 둘이 신작로 복판에서 왁자지껄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선비가 가까이 가자 "자, 그럼 우리 저 사람한테 물어보자." 하는 것이다. "보래요, 우리가 내기를 했는데요. 저기 저 하늘에 떠 있는 게 해이껴, 달이껴?" 서녘 하늘엔 둥근 해가 지고 있었는데 유난히 크고 벌개서 달 비슷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보름달이 서쪽에서 뜰 리가 없지 않은가! 순간 장난기가 동한 이 선비는 두 총각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왈, "글쎄, 나는 이 동네에 안 살아 봐서 잘 모르겠네." '숙맥열전(菽麥列傳)' 중 한 편이다. 이런 이야기 109편이 안동을 위한 변명, 숙맥열전, 개화백태, 안동 그 낯선 .. 2024. 1. 29.
노년은 슬프다(시몬 드 보부아르) 시몬 드 보부아르는 방대한 저서《노년》에서 노인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제1부 외부에서 본 노년 제1장 노화와 생물학 제2장 민족학적 자료들 제3장 역사 사회에서의 노년 제4장 현대 사회에서의 노년 제2부 세계 속의 존재 제5장 노년의 발견과 수락 : 육체의 산 경험 제6장 시간, 활동, 역사 제7장 노년의 일상생활 제8장 노년의 실례들 결론 아래는 제7장 '노년과 일상생활' 중에서 발췌해 본 문장들이다. 노년은 비참하고 슬프다. 누가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 말은 위안이 되지 않는다. 노년은 슬프고 비참하다. 어쩔 수 없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결론에서 그 비참함, 슬픔을 극복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 책의 부제도 "나이듦의 의미와 그 위대함"이다. 나는 그 결론, 부제를 보면서도, 노년은 .. 2024. 1. 22.
글을 쓴다는 것 : 멋있는 유발 하라리 과학은 자연선택으로 빚어진 유기적 생명의 시대를 지적설계에 의해 빚어진 비유기적 생명의 시대로 대체하는 중이다. 특히 오늘날의 과학은 우리에게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재설계할 수단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역사 과정 동안 수많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혁명이 존재했지만 인간 그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신라시대나 고대 이집트 시대 선조들과 여전히 동일한 몸과 마음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사회와 경제뿐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도 유전공학, 나노 기술, 뇌기계 인터페이스에 의해 완전히 바뀔 것이다. 몸과 마음은 21세기 경제의 주요한 생산물이 될 것이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서문을 읽으며 아득한 느낌이었다. 독후감을 쓰기가 어려울 것 같은 절망 같은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흥분하지.. 2024. 1. 20.
존 러스킨, 마르셀 프루스트 《참깨와 백합 그리고 독서에 관하여》(2) 존 러스킨, 마르셀 프루스트 《참깨와 백합 그리고 독서에 관하여》 유정화, 이봉지 옮김, 민음사 2018 존 러스킨의 견해(예) 존 러스킨의 강연은 95개 절(節)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은 그중 한 절이다 25. (...) 축어적 검토야말로 독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세와 표현을 세세히 살피고 항상 저자의 입장에서 보며, 우리 개성을 지우고 저자의 입장이 되어 밀턴을 오독하면서 "나는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밀턴이 이렇게 생각했군요."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거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여러분은 다른 책을 읽을 때도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라는 것에 점차 무게를 두지 않게 될 겁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그다지 심각하게 중요하지은 않다는 사실, 그리고 어느 주제에 대한 여러분.. 2024. 1. 15.
존 러스킨, 마르셀 프루스트 《참깨와 백합 그리고 독서에 관하여》 존 러스킨, 마르셀 프루스트 《참깨와 백합 그리고 독서에 관하여》 유정화, 이봉지 옮김, 민음사 2018 1 독서란 어떤 것인지, 존 러스킨과 마르셀 프루스트의 견해가 극명하다. 「참깨: 왕들의 보물」「백합: 여왕들의 화원」은 남성(왕)과 여성(여왕)을 대상으로 한 존 러스킨의 강연집이고 「독서에 관하여」는 마르셀 프루스트가 존 러스킨의 강연 내용을 보고 반박한 내용으로 두 가지 다 흥미로웠다. 러스킨은 독서가 인생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독서 관행, 책의 가치와 특징, 독서법, 교육의 목적과 의무, 여성 교육, 가정과 사회에서의 여성의 역할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확고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는 책 자체의 내용, 단어의 정확한 의미 파악과 사용 등을 국민 교육의 입장에서 강조했다. 2.. 2024. 1. 14.
요즘 누가 소설을 읽나요? 성준과 나의 소망은 킹크랩을 배가 터지도록 한번 먹어보는 것이었다. 물론 진짜 소원이랄 게 그것뿐이냐 하면 집도 갖고 싶고 차도 갖고 싶고, 아무튼 돈을 잔뜩 갖는 것이 궁극적인 소원이겠지만 우선은 킹크랩. 내 얼굴보다 큰 등딱지를 엎어놓고 스팀에 제대로 푹푹 쪄다가 집게다리부터 우적 뜯어서 한입에 와아아앙, 입속에서 게살이 사르르 녹아 없어질 테지. 게다가 킹크랩 딱지에 비며 먹는 밥은 또 어떻고. 먹어보지 않아 맛은 모르겠으나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밥알이 그냥 봐도 한껏 고소하고 녹진하겠지. 세상에 그것보다 맛난 건 없을 거다, 아마도. 월간 『현대문학』1월호에서 단편소설「퀸크랩」(이유리)을 읽다가 이렇게 재미있어도 되나 싶은 마음으로 소설가 생각을 했다. 소설가의 생활, 소설가의 낭만, 보람, 애환.. 2024. 1. 12.
한병철 《서사의 위기》 한병철 《서사의 위기》 최지수 옮김, 다산북스 2023 정보 과잉 사회는 그 속에서 '스토리텔링'을 외친다.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전시하듯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찰나의 장면들을 끊임없이 공유하고 공감 버튼을 누른다. 그러나 그 안에 의미는 없다. 사라져 버릴 정보에 불과하다. 무언가를 끝없이 공유하고 타인과 교류하면서도 고립감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토리텔링은 '스토리셀링Storyselling'이라는 자본주의의 달콤한 무기가 되어 마치 의미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유혹한다. 세상으로부터 충격받고 저항하고 간극을 느끼며 자신만의 철학을 쌓아 올릴 기회를 빼앗고 그저 '좋아요'를 외치게 만든다. 역자 서문의 한 대문이다. 본문을 다 읽고 다시 읽었다. 더하거나 뺄 것이 없다. 문장들은 짧.. 2024. 1. 6.
발견 : 삶과 아름다움 사이의 절망적 간극 극복 방법 여기 돈이 많아서 집 안을 아름답게, 화려하게 꾸며놓고 살아가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젊은이가 있다. 누추한 자신의 집을 둘러보며 우울해하는 그 젊은이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에세이에 등장한다. 젊은이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식탁에 앉아서 식탁보 위의 나이프, 먹다 만 과일 조각, 뜨개질을 하고 있는 어머니, 찬장 위 술병 옆의 고양이를 둘러보며 서글퍼하고 혐오감을 느낀다. 프루스트는 이 젊은이가 우울함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고 싶어서 그를 루브르 박물관으로 가게 하되 웅장한 궁전을 그린 베로네세, 항구 풍경을 그린 클로드, 군주의 생활을 그린 반다이크의 그림보다는 장 바티스트 샤르댕의 작품이 있는 곳으로 안내한다. 화가 샤르댕은 과일 그릇, 주전자, 커피 주전자, 빵 덩어리, 나이프, 와인이 담긴 유리잔, 납작한.. 2024. 1. 4.
베르톨트 브레히트(희곡) 《갈릴레이의 생애》 베르톨트 브레히트 《갈릴레이의 생애》 백정승 옮김, 동서문화사 2014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 "서푼짜리 오페라"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에 마음이 많이 흔들려서였는지 "갈릴레이의 생애"는 굳이 읽어야 할까 싶었었는데(그 과학자의 극적인 삶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좀 있다는 주제넘은 생각으로), '베르톨트 브레히트라는 극작가는 이 과학자를 어떻게 보았을까?' 싶어서 좀 읽다 그만두더라도 일단 읽어보자 싶었다. 그랬는데 (이런!) 그게 아니었다. 좀 안다는 생각은 착각이었고 그것이 부끄러워서 몰입하게 되었고, "서푼짜리 오페라"나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보다 감명 깊었다. 망원경을 들여다보고 발견한 별들을 가정부와 그녀의 아들에게 보여주는 장면, 더 나은 생활을 하며 연구에 열중하고 싶어 어린애인 피렌체 .. 2024. 1. 3.
베르톨트 브레히트(희곡)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베르톨트 브레히트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백정승 옮김, 동서문화사 2014 30년 종교전쟁(1618~1648) 때, '억척어멈'이라 불리는 종군주보(從軍酒保) 마차 주인 안나 피얼링이 우여곡절을 겪으며 큰아들 아일립, 작은아들 슈바이처카스를 잃고 마침내 자신도 위험에 처했으나 벙어리 딸 카트린이 목숨을 바쳐 북을 울림으로써 억척어멈 자신은 목숨을 이어가는 이야기다. 그녀는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군목과 취사병을 이용하기는 해도 그들의 유혹과 술수에 넘어가지는 않는다. 대사 속에 전쟁의 참상과 그 의미가 다 들어 있다(예). 억척어멈 (...) 용병대장이나 왕이 아주 미련해 부하들을 똥통으로 몰아넣으면 부하들은 결사적인 용맹성을 지녀야 하지, 그리고 덕목도 있어야 하고. 그 자가 인색해서 병사를 너무 적게.. 2023. 1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