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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김원길 편저 《안동의 해학》

by 답설재 2024. 1. 29.

김원길 편저 《안동의 해학》
지례예술촌 2012
 
 
 

 
 
 

해와 달
 
선비 한 사람이 해질녘에 어느 시골 동네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떠꺼머리총각 둘이 신작로 복판에서 왁자지껄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선비가 가까이 가자 "자, 그럼 우리 저 사람한테 물어보자." 하는 것이다.
"보래요, 우리가 내기를 했는데요. 저기 저 하늘에 떠 있는 게 해이껴, 달이껴?"
서녘 하늘엔 둥근 해가 지고 있었는데 유난히 크고 벌개서 달 비슷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보름달이 서쪽에서 뜰 리가 없지 않은가!
순간 장난기가 동한 이 선비는 두 총각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왈,
"글쎄, 나는 이 동네에 안 살아 봐서 잘 모르겠네."
 
 
'숙맥열전(菽麥列傳)' 중 한 편이다.
이런 이야기 109편이 안동을 위한 변명, 숙맥열전, 개화백태, 안동 그 낯선 문화, 망발(妄發), 재담과 기지, 현자열전(賢者列傳) 등 일곱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2012년 가을에 내게로 왔고, 그동안 나는 등표지만 바라보다가 몇 편이라도 읽어보자 싶어 시작했는데 종일 들고 앉아 다 읽어버렸다.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김원길 시인에게 미안한 마음을 어떻게 하나...'
 
 
임하공(臨河公)
 
지금 안동시 임하면에 폐교된 채로 남아 있는 임하초등학교 건물은 일제 때는 임하공립보통학교였다. 초창기 학교 시설의 거개가 지주의 토지 기부와 주민의 성금으로 지어졌듯이 이 학교도 임하면 유지의 성금을 모아서 지은 것이다.
개교하는 날 원근에서 모여든 학부모와 구경꾼이 교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이때 흰 두루마기에 갓을 쓴 노인 두어 분이 교문 문설주에 세로로 쓰인 교명(校名)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언가 느낀 바가 있는지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동행이 들으라고 크게 말했다.
"임하공립 보통학교(臨河公立 普通學校)라! 왜놈도 경우가 말짱하구만. 우리 돈으로 지었다고 임하공이 세운 보통학교라고 썼네그랴."
"암! 우리 말고 임하공이 또 누가 있겠나?"
지례마을 출신 김종길(金宗吉) 교수(고려대)에 의하면 이 이야기는 이렇게도 전해진다고 했다. 다른 동네 선비가 와서 보더니 "임하공이 웬 돈이 있어서......" 하더란 것이다.
[출처 : 지례마을]
 
군소리  '공립(公立)'이라는 일본식 한자어를 모르는 노인들이 "臨河公 立 普通學校(임하공이 보통학교를 세우다)"로 끊어 읽은 것이다.
 
 
이 이야기는 '개화백태'에 실렸다. 갓을 쓴 그 노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한 편만 더 옮겨 쓴다면 어떤 것이 좋을까, 많이 망설였다.
비교적 짧은 글 중에서 선택하기로 했다. 현자열전(賢者列傳)의 '자네가 눕게'가 좋겠다.
 
 
자네가 눕게
 
퇴계 선생이 병환이 나서 몸져눕게 되었다. 문도(門徒) 한 사람이 문병을 와서 병석 옆에 꿇어앉았다. 퇴계가 말했다.
"손님을 누워서 맞이하니 예가 아닐세. 내가 일어나 앉을 수가 없으니 자네가 내 옆에 눕게나."
 
 
이것이  전부다.
김원길 시인의 '군소리'(첨언)에도 "전해지지 않는다"고 되어 있지만 어쨌든 그 제자가 퇴계 선생 옆에 누웠는지 어쨌는지는 이 글에 나와 있지 않다.
아마도 "선생님, 저는 괜찮습니다." 했겠지? 무릎 꿇은 그대로 있었겠지?
그걸 독자가 마음대로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 이 이야기의 결정(結晶) 같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야기다운 이야기라면 서너 살 유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이런 '결정(알맹이)'이 있어야 한다.
제자더러 자신의 옆에 좀 누우라고 한 퇴계 선생의 그 성품도 성품이려니와 그 일화를 통해 잊힐 수 없는 생각들을 하게 해 준 그 가르침(물론 해학을 포함하여)이 얼마나 큰지 짐작조차 어려운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잘 보관할 것이다.
펴낸곳 '지례예술촌'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와! 멋진 곳'이다. 지례예술촌 촌장(김원길 시인)이 이 책을 썼다. 어떤 이야기에는 그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