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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존 러스킨, 마르셀 프루스트 《참깨와 백합 그리고 독서에 관하여》(2)

by 답설재 2024. 1. 15.

존 러스킨, 마르셀 프루스트 《참깨와 백합 그리고 독서에 관하여》

유정화, 이봉지 옮김, 민음사 2018

 

 

 

 

 

 

 

존 러스킨의 견해(예)

 

존 러스킨의 강연은 95개 절(節)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은 그중 한 절이다

 

25. (...) 축어적 검토야말로 독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세와 표현을 세세히 살피고 항상 저자의 입장에서 보며, 우리 개성을 지우고 저자의 입장이 되어 밀턴을 오독하면서 "나는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밀턴이 이렇게 생각했군요."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거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여러분은 다른 책을 읽을 때도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라는 것에 점차 무게를 두지 않게 될 겁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그다지 심각하게 중요하지은 않다는 사실, 그리고 어느 주제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이 가장 명쾌하고 현명한 결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겁니다. 실은 여러분이 매우 특이한 사람이 아니라면 여러분에게 생각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진지한 문제에 있어서 생각 거리조차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겁니다.* 여러분에게는 생각할 권리는 없고 단지 사실을 더 많이 배우려고 노력할 권리만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했다시피 여러분이 특이한 사람이 아니라면) 평생, 일상적이고 익숙한 문제를 제외하고는 어떤 문제건 그것에 관한 견해를 가질 합법적 권리가 없을 겁니다. 꼭 해야 할 일이 있을 경우 여러분은 반드시 방법을 찾아낼 겁니다. 집을 정리하고 물건을 팔며 밭을 갈고 도랑을 치우는 일에 두 가지 견해는 필요 없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한 견해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면 여러분 책임입니다. 이외에도 단 하나의 견해만 필요한 문제들이 하나둘 더 있습니다. 사기와 거짓말은 불쾌한 것이므로 눈에 띌 때마다 당장 매질을 해서 쫓아내야 한다는 것, 탐욕과 다툼을 좋아하는 것은 어린아이일지언정 위험한 기질이며 성인이나 국가에 있어서는 치명적인 기질이라는 것, 그리고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하나님께서는 적극적이며 겸손하고 친절한 사람들은 사랑하시고 게으르고 교만하고 욕심 사납고 잔인한 사람들은 싫어하신다는 것 등입니다. 이런 일반적인 사실에 대해서 여러분은 오로지 하나의 견해, 그것도 매우 강력한 견해를 지녀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 외의 종교성이 강한 정부, 과학, 예술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여러분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어느 것도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겁니다.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도 잠자코 매일같이 더 현명해지고 다른 사람들의 사상을 조금이라도 알아가려고 애쓰는 것이 최선임을 알게 될 겁니다. 여러분이 정직하게 이런 노력을 한다면, 가장 현명한 사람의 사상도 결국은 그의 견해를 피력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질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곧 알아차릴 겁니다. 난해함에 명쾌한 형태를 입혀서 그들이 결단을 내리지 못한 근거를 보여 주는 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

 

 

마르셀 프루스트의 견해(발췌)

 

책은 작가에게는 '결론'이지만 독자에게는 '도발'이다. 작가의 지혜가 끝나는 지점이 바로 독자의 지혜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우리는 작가가 답을 주기를 바라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란 단지 우리에게 욕망을 불어넣는 것뿐이다.(159)

 

독서는 우리 내면 깊이 위치한 장소들의 문을 열어 주는 일종의 마법 열쇠와도 같다. 만일 독서가 이런 인도자 역할만 한다면 독서는 우리 삶에 유익하다. 그러나 만일 정신의 개인적 삶에 눈을 뜨게 해 주는 대신 그 삶을 대치하려 한다면 독서는 위험해진다. 즉 진리가 성숙된 사고와 감성의 노력에 바탕해야만 실현 가능한 하나의 이상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손에 이미 만들어져 책갈피 사이에 끼어 있는 하나의 완성된 물건으로 간주될 때, 그리하여 단순히 서재 선반들에 꽂힌 책들에 손을 뻗어서 펼친 다음, 몸과 마음이 쉬는 상태에서 수동적으로 맛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될 때 독서는 위험해진다. 물론 간혹 매우 예외적인 경우, 진리가 이처럼 손쉽게 닿는 서재 선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닿기 힘든 외부에 감춰진 경우도 있다(비밀문서, 미공개 서한, 비망록 등).(164~165)

 

유익한 독서라는 것이 있다면 시인이나 문인들보다는 사상가의 경우에 적당한 말이다. 예를 들어 쇼펜하우어는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박학다식을 아주 가볍게 처리하는 정신적 에너지를 지녔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은 곧바로 그 요지, 즉 그 지식에 담긴 생명력 있는 부분만으로 분리되어 파악될 수 있었다.(171)

 

우정, 적어도 개인들 사이에서의 우정은 가볍고 변덕스러운 것이고 독서 또한 일종의 우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우정은 적어도 진실한 우정이다. 죽은 사람, 현재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우정이기에 이해타산을 초월해 있고, 따라서 상당히 감동적이다. 또한 이 우정에는 보통의 우정에 흔히 수반되는 추악함이 없다.(173)

 

책에 대한 애호는 지성이 커짐에 따라 더 커지지만 (...) 그 위험은 지성이 커짐에 따라 줄어든다. 독창적인 정신은 독서를 개인적 활동의 지배 아래 둘 줄 안다. 그에게 있어 독서는 가장 고상한 오락의 하나일 뿐이지만 독서와 지식이 정신에 일종의 격식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품위 향상에 가장 도움이 되는 오락이기도 하다. 우리의 감성과 지성은 우리 정신의 심저에서 우리 스스로 발전시켜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 정신의 매너에 대한 교육은 독서, 즉 다른 정신들과의 접촉으로 이루어진다.(177)

 

『신곡』과 셰익스피어 작품을 읽으며 나는 눈앞에서 현재 속에 과거가 살포시 끼어드는 느낌을 수없이 받지 않았던가!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광장에서 회색과 분홍색이 섞인 두 거대한 화강암 기둥 앞에서 느끼는 꿈같은 그 느낌 말이다. 그리스식 기둥머리 위에 악어를 밟고 서 있는 성 테오도르상, 산마르코의 사자상을 인 기둥들, 바다 건너 동방에서 건너온 아름다운 여인 같은 이 거대한 기둥들은 먼바다를 바라본다. 바다를 건너온 파도는 발밑에 부서지고 주위에서는 여러 가지 말이 바삐 오가지만 그녀들 고향의 언어가 아니므로 알아들을 수 없다. 그래서 그녀들은 무심한 미소를 빛내며 이 광장에 서서 우리의 현재 한가운데에 그녀들의 12세기 나날을 끼워넣는다. 그렇다. 광장 한가운데, 현재의 한가운데 12세기의 한 조각이, 그토록 오래전에 사라져 버린 12세기의 한 모퉁이가 현재의 지배를 중지하고 분홍색 화강암 기둥 둘을 따라 올라가며 피어난다. 기둥 주위에는 현대의 나날, 우리가 사는 오늘들이 붕붕거리며 몰려들어 빙빙 돈다. 그러나 기둥에 닿으면 그것들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 벌떼처럼 도망친다. 왜냐하면 이 길고 가는 석조 타임캡슐은 현재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가 범접할 수 없는 다른 시간대에 속하기 때문이다. 커다란 기둥머리 쪽으로 용솟음치는 분홍빛 기둥 주위로 현재의 나날이 몰려들고 붕붕대지만 기둥들은 그 한복판에 버티고 서서 그 가녀린 몸에 의지하여 현재를 물리치면서, 절대로 범접할 수 없는 과거의 자리를 꿋꿋이 지킨다. 현재의 한복판에 친근하게 솟아난 과거에는  다소 비현실적인 색깔이 입혀져 있다. 환각처럼 몇 걸음 안 떨어진 곳에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수세기의 간극을 두고 떨어져 있는 사물들 같다. 과거는 이렇게 우리 영혼에 전면적으로 말을 걸면서 묻혀 버린 시간에서 돌아온 유형이 그러듯 우리를 놀랜다. 묻힌 시간, 지나간 과거, 그러나 곳곳에, 우리들 사이에 있다. 우리에게 접근하고, 우리를 스쳐 가고, 또한 우리가 만질 수 있는 과거가 햇빛 아래 꼼짝 않고 서 있다.(184~185, 이 책의 끝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