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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요즘 누가 소설을 읽나요?

by 답설재 2024. 1. 12.

미래엔(요즘은 차현주 님)이 선물해주고 있는 월간 『현대문학』.이 책은 윤광원 부사장이 23년간 보내주었었다.

 

 

 

성준과 나의 소망은 킹크랩을 배가 터지도록 한번 먹어보는 것이었다. 물론 진짜 소원이랄 게 그것뿐이냐 하면 집도 갖고 싶고 차도 갖고 싶고, 아무튼 돈을 잔뜩 갖는 것이 궁극적인 소원이겠지만 우선은 킹크랩. 내 얼굴보다 큰 등딱지를 엎어놓고 스팀에 제대로 푹푹 쪄다가 집게다리부터 우적 뜯어서 한입에 와아아앙, 입속에서 게살이 사르르 녹아 없어질 테지. 게다가 킹크랩 딱지에 비며 먹는 밥은 또 어떻고. 먹어보지 않아 맛은 모르겠으나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밥알이 그냥 봐도 한껏 고소하고 녹진하겠지. 세상에 그것보다 맛난 건 없을 거다, 아마도.

 

 

월간 『현대문학』1월호에서 단편소설「퀸크랩」(이유리)을 읽다가 이렇게 재미있어도 되나 싶은 마음으로 소설가 생각을 했다. 소설가의 생활, 소설가의 낭만, 보람, 애환, 소설가의 생애, 소설가에 대한 이것저것들... 소설가들은 왜 소설가로 살아가는 것일까...

 

 

무식한 소리지만 요즘 누가 소설을 읽나요? 소설을 읽고 앉아 있을 만큼 한가로운 사람이 어디 있기나 한가요? 제가 듣기로는 소설을 쓰던 사람들도 다 떠나는 마당이라던데요. 그러나 본인이 그렇게 원을 한다면 아내로서 지지해 주는 수밖에 없겠지요. 상금 타면 나 뭐 하나 사달라는 말로 저는 오 년째 남편의 도전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첫해엔 응모도 못 했지만, 그 이듬해부터 지금까지 어딘가에 응모를 하긴 하는 모양입니다. 물론 당선된 적은 없고요.

 

 

2015년 12월 17일, 조선일보에서 본 글의 일부다.

[별별다방으로 오세요]라는 코너였는데 글 제목은 "언제쯤 털어버릴까요, 겨울만 오면 도지는 남편의 '신춘문예병'", 그러니까 남편의 '신춘문예병'을 하소연한 어느 주부의 글이었다.

12월 17일이면 각 신문의 신춘문예 작품 모집 기간이 지나고 곧 당선작 발표가 있을 즈음이었겠지?

그 글에는 이런 부분도 있었다.

 

 

곁에서 지켜보니 소설을 쓴다는 게 피트니스 다니는 것과 같은 가벼운 취미 생활은 아니더군요. 방해받지 않고 글을 쓰기 위해 우선 집을 멀리합니다. 회사 사무실에 늦게까지 남아 있거나 휴일엔 혼자 카페를 찾아 나섭니다. 심지어는 작업실을 얻고 싶다는 망언까지 하더군요. 봄여름엔 심드렁하다가도 찬바람만 불면 그 증상이 심해집니다. 글을 쓰지 않을 때도 사람의 정신이 딴 데 가 있을 때가 많습니다. 아이들 공부, 집안 경조사, 자잘하게는 욕실 전구를 갈아야 하는 일까지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아요. 마누라 생일도 그냥 생략하고, 다가올 결혼기념일은 이제 알지도 못합니다.

 

 

"요즘 누가 소설을 읽나요?"라고 했지만 정말 나는 나 말고 소설 읽는 사람을 본 적이 있나?

지금 당장 도서관에 가보면 소설 읽는 사람이 있을까?

인터넷을 보면 소설 읽는 사람이 많은지 적은지 알 수가 없지?

큰 서점 홈피에 들어가 보면 소설 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지. 그렇지만 그것 가지고 읽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 수는 없지?

저렇게 애써서 소설을 쓰는데...

 

소설 읽는 일은 피트니스 다니는 것과 같은 가벼운 취미 생활일까?

소설 읽느라고 집을 멀리하는 사람은 없겠지? 아니, 멀리하는 경우가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겠지?

소설을 읽는다고 회사 사무실에 늦게까지 남아 있거나 휴일에 혼자 카페를 찾아 나서진 않겠지?

봄여름엔 소설읽기에 심드렁하다가도 찬바람만 불면 그 증상이 심해지고, 소설을 읽지 않을 때도 사람의 정신이 딴 데 가 있을 때가 있을까? 아무리 심취해도 그 정도는 아니겠지? 그건 장담할 수 있나?

소설을 읽느라고 아이들 공부, 집안 경조사, 심지어 욕실 전구를 갈아 끼우는 일까지 일절 관심을 두지 않기도 할까? 마누라 생일도 그냥 생략하고, 이제 다가올 결혼기념일도 모르는 경우가 있을까?

 

만약 소설을 읽는 이가 나도 한번 소설을 써봐야지, 하는 경우라면 소설을 쓰는 일이나 소설을 읽는 일이나 별로 다를 것도 없겠지? 대부분 그렇게 하다가 소설가가 되는 것 아닐까?

이런 내 이야기는 농담 같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또 읽는다.

 

 

내가 서둘러 죽기로 결심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전수미, 그 경우 없는 년한테 이것마저 뺏길 순 없기 때문이다. 고작 1년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전수미는 모든 불행과 관심을 독식했다. 내 앞으론 부스러기 하나 남기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을 보고도 읽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수미」

안보윤이라는 소설가의 중편소설이다.

이건 또 얼마나 재미있을까?

 

"요즘 누가 소설을 읽나요?"

"여기요! 세상의 소설을 다 읽을 순 없지만 그래도 눈에 띄는 대로는 부지런히 읽고 있네요. 저 글에서처럼 소설가가 되고 싶은 꿈같은 건 없고 단지 재미있어서 지금까지 수많은 세월 소설을 읽고 있지요. 소설가들에게 고마워하면서요. 세상에 소설이 없었다면 그동안이라도 어떻게 살았을까요? 그러니까 소설가는 꼭 있어야 할 사람이지요. 부인께서 그 부군을 계속 좀 지원해 주시면 좋겠네요. 물론 어렵겠지만요. 소설 읽는 사람은 언제까지라도 있을 것 같으니까 힘 내시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