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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쇼펜하우어의 후배들

by 답설재 2024. 6. 2.

저 직박구리가 "꽤애액!" "꽤애액!" 소리치면서 내 머리 위를 지날 때마다 뭔가를 떨어뜨리며 나를 위협하고 있다. 너라도 나와 사이좋게 지내면 오죽 좋겠나...

 

 

 

'윤리' 시간이었을까? 고등학교 다닐 때 쇼펜하우어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우리는 좀 비관적인 급우를 보면 "너 쇼펜하우어 후배냐?"고 묻고 또 웃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끝이란 건 쇼펜하우어와의 인연 말이다. 굳이 읽어봐야 할 필요도 없었고, 그럴 여가도 없었다. 그렇게 살아도 그것으로 인한 애로 사항은 없기 때문이었고, 그게 우리 한국교육의 장점이고 단점이라고 생각했다.

☞ 사진은 위키나무에서 가져왔음.

 

『캉디드』에서 볼테르는 매우 유쾌한 방식으로 낙관주의에 대항하여 싸운다. 바이런은 『카인』에서 그 특유의 비극적 방식으로 싸웠다. 헤로도토스는 트라키아인들이 새 생명이 태어나면 한탄하고, 사람이 죽으면 즐거워했다고 보고 한다. 플루타르코스 역시 아름다운 시구로 같은 것을 표현한다. "태어난 자를 불쌍히 여기라. 그는 수많은 악에 직면하게 될 테니까." 멕시코인들에게는 이렇게 기원하는 관습이 있다. "내 자식아, 너는 인내하기 위해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참고 고통받고 잠자코 있어라." 같은 맥락에서 스위프트는(윌터 스콧이 쓴 스위프트의 전기에 따르면) 젊을 때부터 생일을 슬픈 날이라고 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죽음을 좋은 것이라고 했던 플라톤의 말을 기억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잠언 역시 같은 생각을 표현한다. "삶은 생(生)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는 사(死)다." 테오그니스의 아름다운 시구들은 너무도 유명하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인간에게는 최선이다." 『콜로니우스의 오이디푸스』(1224행)에서 소포클레스는 요약한다. "태어나지 않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 좋다." 유리피데스는 말한다. "인간의 모든 삶은 고통으로 채워져 있다."(「히폴리투스」189행) 그리고 호메로스는 이미 말한 바 있다. "땅 위에서 살아 숨 쉬는 모든 것 중에서 인간보다 비참한 것은 없다." 플리니우스도 말했다. "때맞은 죽음보다 좋은 것은 없다." 셰익스피어는 늙은 헨리 4세의 입을 통해 말한다. "아, 이런 것을 보게 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젊은이는 책을 덮고 그 자리에 앉아 죽어 버릴 텐데." 마지막으로 바이런의 말이 있다.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낫다." 발타사르 그라시안은 그의 소설 『크리티콘』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인간 삶을 너무도 어두운 색채로 표현한다."

 

 

이 글을 마르셀 프루스트의 「독서에 관하여」에서 옮겼다.

프루스트는 사실은 쇼펜하우어의 비관주의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쇼펜하우어가 하나의 주장을 제시하고 나면 곧바로 여러 인용으로 뒷받침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독자는 그러한 인용문들이 그저 단순한 예시이자 무의식적이고 선행적인 암시 이상은 아니라고 느끼며, 작가는 그런 글에서 자기 생각의 몇몇 측면을 확인할 수 있어 기쁘지만 결코 그것들이 작가 사상의 원천이 된다고 느끼지는 않는다고 했다. 프루스트는 또 쇼펜하우어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한쪽에 스무 개 정도 인용을 연달아 제시했던 것을 기억한다면서 그것은 비관주의에 관한 내용으로 문제의 인용구들을 위와 같이 압축하여 제시할 수 있다고 했다.

 

쇼펜하우어의 비관주의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고?

프루스트가 그렇게 써놓았지만 나는 그걸 별로 대단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어차피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비관주의자이기 때문이다. 마르셀 프루스트 자신도 하필이면 그런 부분을 써놓고 이제 와서 뭘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위의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지나치게 길지만 않았다면 쇼펜하우어의 『삶의 지혜에 관한 금언』을 원용하여 이 논증을 완성할 수도 있었으리라. 이 책이야말로 내가 아는 책 중에서 가장 독서를 많이 한 사람이 썼음에도 가장 독창적인 책이다. 실제로 쇼펜하우어는 한쪽에 여러 인용을 넣은 이 책 서두에서 아주 진지하게 천명했다. "남의 글을 그러모아 편집하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하고 싶은 말을 내가 왜 모르겠는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긴 하지만 쇼펜하우어에 대해 읽어본 적이 없는 나는 '아하! 그렇구나! 다 쓸데없는 일이라고 이렇게 열여섯 가지나 예시해 놓았구나!' 하고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에 대해 더욱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프루스트도 이걸 부인하려는 건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만 얘기해도, 됐다. 이래저래 복잡한 세상이니 이걸로 다 됐다.

 

여담이지만 쇼펜하우어의 저 예시들에 대해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항들에는 ○표를 하며 읽었는데, 그 결과를 여기에 쓸 것까지는 없을 것 같았다.

절망, 비관 같은 것도 죄악이라고 쓴 책을 몇 권이나 봤다. 구태여 나는 절망, 비관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고 부인할 것까지는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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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러스킨, 마르셀 프루스트 『참깨와 백합 그리고 독서에 관하여』(유정화, 이봉지 옮김, 민음사 2018) 171~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