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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놀라운 박형서 소설 《바람이다》

by 답설재 2025. 1. 31.

   박형서(소설) 《바람이다》

《현대문학》 2025년 1월호

 

 

 

유영국 「Work」 1976 (출처 : 현대문학 2025년 1월호 57).

 

 

 

문제집 만드는 출판사 직원 성범수는, 퇴근길 횡단보도에서 난데없이 날아와 등을 건드리고 떨어진 종이비행기를 보다가 보행신호를 놓친다. 아내가 기다리는 그의 빌라까지는 5분 거리다.

 

마침 소를 몰고 가는 끝없는 시위대 행렬이 나타나 길을 헤매다가 결국 인왕산을 우회하는 버스를 타게 되고 뚝섬 인근에서 내려, 일단 번화가까지 간다고 탄 버스로 의왕까지 가고, 거기서 수원으로 가려고 탄 버스에서 너무나 피곤해 잠시 눈을 붙이며 옆자리 할머니에게 깨워달라고 부탁했지만 할머니는 너무 곤히 잠들어 깨우지 않았다고 해서 어둠 속 안성 국도에서 내려버렸고, 그곳 정류장 '개량 한복'의 말을 들었다가 한 시간 넘게 허비한 끝에 트럭 기사와 협상해 오송역으로 가던 중 기사의 급작스러운 사정 때문에 세종시에 내린다. 근근이 대전역에서 서울 가는 기차를 타려고 했는데 임산부의 짐을 내려주고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서울행이 아닌 부산행을 타버렸고 밀양에서 발이 묶였다.

 

성범수는 당연히 매 순간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그 상황에 떠밀리는 꼴이었다.

 

현금인출기에서 계좌잔고 전부를 인출해서 173만 원을 마련한 그는 김해국제공항으로 가려고 했는데 휴전선에서 일어난 원인 불명의 총성 때문에 민간기 이착륙이 전면 금지되었다는 뉴스를 본다. 급히 부산행 시외버스를 타려고 했으나 새치기를 하는 가족 때문에 그 버스를 놓쳐 모범택시를 잡아탔다. 택시 기사는 그동안 그렇게 헤맨 그의 몸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더 이상 못 참겠다고 해서 구포 인근에서 내려 스마트폰의 안내에 따라 어둑어둑한 밤길을 걷다가 백양산 기슭을 속절없이 헤맨다.

 

산바람이 휙 불어와 겉옷 자락이 파닥거렸다. 걸음걸이도 바람 때문에 완만하게 휘었다. 종이비행기에 올라탄 역전의 파일럿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종이비행기는 파일럿이 조종하지 않는다.

바람이 조종한다.

100미터 떨어진 거리와 300킬로미터 떨어진 거리, 또 5억 광년 떨어진 거리는 무엇이 다른가? 다르지 않다. 원하는 바로 그곳에 있는 게 아니라면 우주의 어느 좌표에 있든 마찬가지다. 원하는 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가야 한다. 하지만 길은 늘 구부러져 나 있기 마련이어서, 인간의 차원에 목적지를 향해 직진하는 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원하는 곳'이 있다는 건, '원하는 곳'에 있는 바로 그 한 가지 경우를 제외하면 언제나 비극이다.

 

행려병자 꼴이 되어버린 성범수는 가까스로 백양산을 벗어나 세 시간을 더 헤매다가 백열등 하나가 달린 불법 컨테이너에 들어가 그동안에는 받지 않았던 아내의 전화를 받는다. 불의의 사고로 죽은 딸 때문에 부부는 오랫동안 상심에 쌓여 있었다.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경찰서에 다녀왔어."

"뭐? 왜?"

 

안성에서였던가, 버스에서 두고 내린 그의 가방을 아내가 경찰서에 가서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당신, 어디야?"

"멀어. 아주 멀어."

"왜 안 와?...... 계속 안 올 거야?"

"그럴 리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엉? 갈 거야. 금방 갈 테니 거기서 딱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아무 걱정하지 마. 엉? 내 말 들었지?"

"알았어. 내가 기다릴게."

 

이틀 남짓 헤맨 그는 정신을 차려 어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밀항 브로커에게 걸려 작고 낡은 어선 갑판 아래 저장고에 기어들어가 서너 명의 남녀와 함께 한국을 떠나게 된다.

 

배가 어둠을 뚫고 슬그머니 출발했다. 성범수는 자기 앞을 가로막는 벽이라면 무엇이든, 설령 그것이 인간 사회의 법을 대놓고 어기는 것이라 할지라도, 잡히는 대로 부수며 나아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깊은 고심 끝에 단행한 길이었다. 갖고 있던 돈은 전부 브로크에게 건넸다. 이제는 후회할 자격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앞으로의 계획에 차질이 없도록 온갖 예외적 상황을 가정하며 대비하는 일뿐이었다. 성범수는 눈꺼풀 안팎으로 스며든 어둠 속에서 앞으로 닥쳐올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기회란 기회는 전부 낚아채고, 마침내 쓰러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쓰러지지 않을, 얼어붙지 않을, 통닭이 되지 않을, 마지막 순간까지 대들고 버티고 악을 쓸 각오를 다지고 또 다졌다. 그것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또 그것으로 충분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이 모든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성범수의 지친 육신은 일본 이키섬을 거쳐 폴리네시아로, 남태평양으로, 칠레의 로스라고스로, 남극 에들레이드섬으로, 지구 성층권 밖으로 비정하게 휩쓸려 가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운명은 누구의 잘못이나 잘못된 선택 때문이 아니라 '바람이 인간을 제멋대로 헝클어버린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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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현대문학』(70주년 기념 특대호)에서 봤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야기구나 싶었다. 그렇지 않다면 내 이야기인 건 분명하다.

 

사람들은 2022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BIFF)에 초청된 일본 하야카와 감독의 영화 《플랜 75》("경제 좀먹는 노인" 총살...)를 놀라워했지만, 박형서는 그보다 훨씬 전 2017년 12월 『현대문학』에 그런 이야기를 쓴 소설 『당신의 노후 ("왜 안 죽어? 응? 늙었는데 왜 안 죽어?...") 를 발표했다.

그 이야기는 지금도 생생하다.

    ☞ 졸고 「파충류 혹은 틀딱충」https://blueletter01.tistory.com/7639147

 

 

박형서?

 

1972년 춘천 출생. 2000년 『현대문학』 등단. 소설집 『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자정의 픽션』『핸드메이드 픽션』『끄라비』『낭만주의』. 중편소설 『당신의 노후』. 장편소설 『새벽의 나나』. 〈대산문학상〉〈오늘의젊은예술가상〉〈김유정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