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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로봇과 함께하는 날들의 소설 《마음 깊은 숨》

by 답설재 2025. 2. 2.

   예소연 《마음 깊은 숨》

《현대문학》 2025년 1월호

 

 

 

유영국 「Work」 1967 (출처 : 《현대문학 》 2025년 1월호, 185)

 

 

 

"요시는 안심 케어형 안드로이드잖아요."

"네."

"그러면 화가 날 땐 어떻게 해요?"

"화가 나지 않죠."

"아이가 아무리 떼를 써도요?"

"그럴걸요? 근데 저는 주로 노인을 돌봤어요. 노인도 떼를 써요."

"어쨌든. 그럼 누가 너무 미워서 죽겠던 적 없어요?"

"없어요."

"그렇군요."

"치영 씨는요?"

"저는 거의 화가 나 있는 상태로 누군가를 미워하죠."

"그러면 치영 씨는 분노 맥스형 인간이네요."

내가 어이없다는 식으로 웃자 요시도 한참 웃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런데 설명을 못할 뿐이지, 어떤 상태가 될 때는 있어요. 저는 그걸 '아차 상태'라고 하는데요. 순식간에 아주 깊은 미궁에 빠져버리는 거예요. 저로서는 판단할 수 없는 감정 기능이죠."

 

 

'요시'는 로봇이다. 안심 케어형 안드로이드로 100년 동안 인간을 돌보는 일을 하다가 이제 할머니가 되어 3년간의 확정 기간을 거쳐 폐기 처분될 운명이다.

 

치영은 극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어머니 때문에 안드로이드 주간 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해서 폐기 처분될 로봇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치영도 우울하다. 언니의 죽음으로 어머니와 함께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게다가 24개월치 체납금을 불입하지 못해서 밀레니엄 메모리 센터에 맡겨놓은 기억을 되찾아야 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기억들이 화학작용을 일으켜 신경학적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

 

요시와 치영은 서로의 '맛'을 보게 된다.

요시의 피부에서는 화학적인 실리콘 냄새가 났고 조금 달콤하고 시큼한 맛이 났다.

요시는 치영에게서 피부 맛이 아니라 치영만의 맛을 보고 싶어 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찔러 나오는 피를 맛보았다.

 

"무슨 맛이 나요?"

"현진과는 다른 맛이요. 더 시큼하고 달달한 맛."

 

현진은 요시가 돌보던, 지금은 세상을 떠난 노인이었다. 요시는 그 노인의 연인이었다.

치영은 요시가 자신의 피맛을 이야기하자, 오래도록 묵혀 있던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을 느낀다. 자신의 삶이 명백히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지난한 일상의 고통 속에서도 피는 어딘가로 흐르고 맺히고 터져 나올 수 있다는 것.

치영은 요시를 포옹하고 요시는 사람처럼 그녀에게 안긴다.

 

"저는 당신이 아주 질 좋은 잠을 잤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일어나 손을 뻗어 나를 찾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다 이내 내가 없다는 걸 깨닫고 지독한 슬픔에 사로잡히는 상상을 하곤 해요. 내가 사라지고 나서야 사람들이 기어코 슬퍼하는 그런 상상. 이런 식의 상상을 하고 나면 기분이 조금 나아져요. 현진의 죽음에 대해서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거든요."

 

치영은 요시를 집으로 초대한다. 요시는 그녀의 어머니도 병석에서 일어나게 한다. 요시는 그녀의 피를 음미하고 단시간에 깊게 고인 것 같은 짠맛, 지독한 맛이라고 말한다.

고통 속에서 그 고통으로 병든 사람은 자신의 그 지독한 맛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때 그 병이 치유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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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영은 요시가 폐기되지 않도록 하고 함께 한 가족으로 살아가겠지.

요즘은 이런 소설을 자주 보게 된다. 장르 소설? 판타지 혹은 미래예측 소설.

《마음 깊은 숨》은 로봇의 따듯한 가슴을 이야기한 소설이어서 이 삭막한 세상이 한결 살 만한 곳으로 변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꿈을 갖게 한다.

세상은 따뜻한 사람만 살아가는 곳은 아닌 것처럼 이번에는 로봇 중에 따듯한 가슴을 지닌 것이 태어날지도 모른다.

이런 대화도 자주 눈에 띈다. "사람씩이나 돼서 로봇 돌보는 거 부끄럽지 않아요?"

 

예소연?

 

1992년 경기 광명 출생. 2021년 『현대문학』 등단. 소설집 『사랑과 결함』. 장편소설 『고양이와 사막의 자매들』, 〈문지문학상〉〈황금드래곤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