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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솔로몬 노섭 《노예 12년》

by 답설재 2025. 2. 4.

지금은 노예가 없나?

직원을 노예로 생각하는 사업가, 경영인은 없나? 노예 부리 듯하면서 노예 부리듯 하는 게 아니라고 착각하는 사람, 노예처럼 일하고 살아가면서 노예처럼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자위하는 사람은 없나?

다만 모를 일일 뿐이다.

 

 

 

 

 

 

솔로몬 노섭 《노예 12년》

유수아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2014

 

 

 

지금은 노예가 없나? 직원을 노예로 생각하는 사업가, 경영인은 없나? 노예 부리 듯하면서 노예 부리듯 하는 게 아니라고 착각하는 사람, 노예처럼 일하고 살아가면서 노예처럼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자위하는 사람은 없나?

다만 모를 일일 뿐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참혹한 실화 《노예 12년》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았다. 어디서 어떤 일을 겪게 되는지, 가슴 조이게 했다.

 

뉴욕에서 자유인으로 태어난 솔로몬 노섭은 노예 상인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를 잔인하게 다루기로 악명 높았던 남부 루이지애나로 팔려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고난을 다 겪고 12년 만(1841~1853)에 구조된다.

이 기록에서 노예들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나 노예 제도가 백인 주인의 인간성, 도덕성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노예 시장) 이튿날이 되자 수많은 고객들이 프리맨의 '새 물건'을 보려고 몰려들었다. 프리맨은 우리들의 장점과 자질에 대해서 주저리주저리 말을 많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리한테 고개를 들어보라는 둥, 가볍게 앞으로 뒤로 걸어보라는 둥 하면서 고객들이 우리의 손이나 팔, 몸을 만져볼 수 있도록 했다. 마치 기수가 말을 사려고 꼼꼼히 살펴보는 것처럼 고객들은 우리를 이리저리 훑어보면서 뭘 할 줄 아는지 물었고, 입을 벌려보라면서 치아를 살폈다. 이따금씩 마당에 있는 작은 집으로 한 명씩 데려가서 옷을 벗겨놓고 더 세밀히 살펴보기도 했다. 등에 흉터가 많은 노예는 반항적이거나 말을 잘 안 듣는 성격으로 여겨져서 잘 팔리지 않았다.(65)

 

(엄마 노예는 팔렸는데 그녀의 어린 딸은...) 그 신사는 이렇게 어린 노예는 필요도 없고 쓸모도 없지만 엄마가 너무나 소중히 여기는 딸이어서 서로 헤어지게 하기가 안타까우니, 기꺼이 제값을 치르겠다고 설득했다. 하지만 이런 인간적인 제안에도 프리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에밀리가 조금만 더 나이 들면 억만금도 벌어다 줄 텐데 왜 지금 파느냐며 어떤 값에도 팔지 않을 거라고 고집을 부렸다. 목화나 따는 검둥이처럼 두꺼운 입술의 멍청이가 아니라 인형처럼 예쁜 아이라면서, 에밀리처럼 독특하고 어여쁜 물건이라면 5000달러를 불러도 기꺼이 사 갈 남자들이 뉴올리언스에 차고 넘친다고 했다. 절대로 팔지 않을 태세였다.

엘리자는 에밀리를 내놓지 않겠다고 프리맨의 단호한 말을 듣자마자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날뛰기 시작했다.(71)

 

(채찍질) 순찰대원들은 와일리를 심하게 채찍질한 다음, 엡스에게 넘겨주었다. 와일리는 엡스에게서 훨씬 더 심한 꼴을 당했다. 채찍이 온 살갗을 갈라놓았고 개들이 온몸을 다 헤집어놓았다. 와일리는 몸이 뻣뻣해져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비참한 지경이 되었다. 이런 상태로 밭일에서 뒤처지지 않고 속도를 내기란 불가능했고, 결국 날마다 주인에게 채찍질을 당하지 않고 넘어가는 시간은 다 합쳐봐야 채 1시간도 되지 않았다. 와일리의 등은 언제나 피범벅이었다.(201)

 

(노예 제도에 대한 솔로몬 노섭의 생각) 노예 제도의 존재가 인간의 잔인한 본성을 더 악화시키는 것 같았다. 날마다 인간이 고통받는 모습을 목격하면 잔인하고 무감각해지기 마련이다. 노예들이 괴로워 내지르는 비명을 듣고, 무자비하게 채찍질을 당하는 모습을 보며,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죽어 관도 없이 묻히는 모습을 보는데, 어떻게 인간의 목숨을 중히 여길 수 있겠는가. (...) 노예 상인의 잔인함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제도의 잘못이다. 개인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관습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주 어릴 때부터 사람들이 노예의 등을 채찍으로 내리치는 모습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어릴 때 고착된 인식은 좀처럼 바꾸기 힘든 법이다.(173)

 

이 기록은 소설《톰 아주씨의 오두막》(해리엇 비처 스토)과 함께 노예 해방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한다.

안타까운 사실이 있다.

솔로몬 노섭은 기록을 마치며 이렇게 썼다.

 

"나는 모든 걸 참고 용서하고자 한다. 나는 그동안 겪었던 고통 덕분에 더욱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었고, 여러 좋은 사람들 덕분에 이렇게 다시 행복과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앞으로 내게 남은 소원은 소박한 삶이나마 당당하고 꿋꿋하게 누리다가 아버지가 잠든 교회 안마당에 같이 묻히는 것뿐이다."

 

그러나 1853년에 다시 자유인이 되었던 그 솔로몬 노섭은 1857년 이후 행방이 묘연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