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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파충류" 혹은 "틀딱충"

by 답설재 2018. 2. 11.

 

 

 

1

 

불치병을 앓는 젊은 여성이 '경로석(?)'에 앉아 있는데, 한 노인이 다가가 다짜고짜 그 여성의 뒷덜미를 쳤답니다.

그 얘기는 아내가 텔레비전에서 보고 해주었습니다.

구체적인 얘기였는데 지금 내겐 경로석(혹은 장애인석, 임산부석, 영유아 동반자석……)에 앉은 여성과 그 여성의 뒷덜미를 쳐버린 노인의 이미지만 남아 있습니다.

 

 

2

 

강 하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부터 서서히 고개를 돌려 상류의 빅벤에 이르기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런던의 아름다운 관광명소들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두통과 피로는 계속되겠지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겉으로는 아무리 쇠약해 보일지라도 과거와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이 든다. 이것을 젊은이들에게 설명하기란 쉽지가 않다. 우리 같은 노인들이 겉모습은 파충류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동물이나 외계인은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 일이 년 후에는 이런 익숙한 주장조차 못 하게 될지 모른다. 중병에 걸린 사람들, 정신을 잃어가는 치매 환자들은 다른 종족, 더 열등한 종족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위로하기 위해 그렇지 않다고 설득하려 든다면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소설 『속죄』(이언 매큐언)에서 본 문장입니다.1 파충류…….

 

 

3

 

이번에는 『당신의 노후』(박형서)라는 소설의 한 장면입니다.2 연금공단을 소재로 한, 단지 소설일 뿐입니다. 소설(小說)입니다, 소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자네도 알다시피, 신학대를 그만두고 팀에 들어올 당시의 나는 꽤 화가 나 있었다네. 모아둔 돈도 없는 주제에 늙어서 죽겠다는 게 얼마나 이기적인 얘기인가? 젊은이가 노인들 부양하려고 사나? 세상이 너무나 꽉 막혀 있었지. 살리기 위해서는 숨통을 터주어야 했네. 하릴없이 연금이나 축내는 늙은이들을 처리하면 나아질 줄 알았다네. 하지만 끝도 없었지. 이 빌어먹을 늙은이들은 도대체 어느 소굴에서 기어 나오는 걸까? 좌표라도 뜨면 가서 불을 지르고 싶었다네. 매일매일 힘겹게 처리해도 다음 날이 되면 빳빳한 새 리스트가 전달되곤 했지. 잠도 제대로 못 잘 지경이었어. 하지만 언젠가 끝이 있을 거라 생각했네. 결국, 몽땅 처리해버리면 될 테니까. 아주 산술적인 생각이었지만 그 바보 같은 산수가 국가에 봉사하는 길이라 믿으며 나 자신도 잊은 채 살았다네."

(…)

제풀에 격해진 젊은이가 가슴까지 들썩이며 말했다.

"왜 안 죽어? 응? 늙었는데 왜 안 죽어? 그렇게 오래 살면 거북이지 그게 사람이야? 오즘 툭하면 120살이야. 늙으면 죽는 게 당연한데 대체 왜들 안 죽는 거야? 온갖 시시콜콜한 병에 걸려 골골대면서도 살아 있으니 마냥 기분 좋아? 기분 째져? 어제도 출근하다 보니 어떤 노파가 횡단보도를 점거하고는 5분 동안 건너더라고. 영락없이 지각을 해서 이사장님한테 꾸중 들었지 뭐야. 나라 전체가 그래. 사방이 꽉 막혀서 온통 썩어가고 있어. 하는 일이라고는 영혼이 떠나지 않도록 붙들고 있는 게 전부인 주제에 당신들 대체 왜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거야?"

장길도는 문득 젊음의 정체가 의아해졌다. 젊은 시절 당연히 누리던 그 싱그러운 감각이 통 생각나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잊어버린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건 왜 잠깐 주어졌다가 사라지는 걸까?

 

위 소설을 다룬 평론의 서두입니다.3

 

언제부턴가 '틀딱충'이라는 표현이 인터넷 커뮤니티 곳곳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틀니를 딱딱거리는 벌레. (…)

 

 

4

 

지난해(2017년)에 우리나라가 고령사회로 진입했답니다. 통계적으로 100명 중 14명이 65세 이상이라는 의미랍니다.

평일, 휴일 할 것 없이 교외로 나가는 전철을 타면 '노인들 좀 봐!' 싶고, 거기에 나도 있습니다.

텔레비전에도 인터넷에도 요즘 온통 "그렇게 한 건 잘못"이라고들 분노하는 기사가 오릅니다.

 

이건 정치, 경제 같은 기사 얘기가 아닙니다.

나는 경로석에 앉은 젊은 여성의 뒷덜미를 친 그 노인과 추호도 다르지 않은 '파충류' 혹은 '틀딱충'입니다.

전에는 아니었는데, 아니 아닌 줄 알았거나 아닌 척해도 괜찮았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못합니다. 할 말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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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학동네 2015, 499.
2. 박형서 중편소설 『당신의 노후』(『현대문학』 2017년 12월호, 64~132면 중 105~106, 125면에서)

3. 한설, '틀딱충을 위한 나라는 없다'(「당신의 노후」 리뷰, 『현대문학』 2018년 1월호, 437~441) 시작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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