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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생명력의 흡수"

by 답설재 2018. 2. 13.

 

 

 

 

 

  버지니아 울프가 『등대로』에서 쓴 '남편과 아내'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놀라웠습니다.

  이런 걸 가지고 놀랍다고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찰스 탠슬리는 그를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형이상학자라고 찬양하고 있다며 그녀가 남편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그 이상의 것을 원했다. 그는 동정이 필요한 것이다. 자기가 세계의 한복판에 있는 영국에서 뿐 아니라 전세계가 그를 필요로 한다는 보장을 받고 싶은 것이다. 램지 부인은 편물 바늘을 분주하게 움직이며 꼿꼿이 앉아 있다가 응접실과 주방을 단정하게 정돈하였다. 그리고 남편에게 마음대로 그곳에 드나들며 마음껏 즐기라고 말하였다. 그녀는 웃으며 양말을 짰다. 그녀의 두 무릎 사이에 몸을 굳히고 서 있는 제임스는, 동정을 요구하며 사정없이 내리치는 메마른 아라비아의 신월도(新月刀) 같은 부친의 몸이 모친의 폭발하듯 치솟는 생명력을 모두 들이마시고 있는 것을 느꼈다.

  나는 실패자라고 그는 되풀이하였다. 그렇다면 보세요, 만져 보세요, 편물 바늘을 움직이며, 주변과 창 밖과 방석과 제임스 따위에 시선을 주면서, 부인은 자기의 웃음과 거동의 능력으로(마치 어둠 속에서 칭얼대는 아기에게 등불을 가지고 가서 달래 주는 보모처럼) 한 점의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이 모든 것이 현실이고, 집안은 생명력으로 충만되어 있으며, 정원에는 꽃이 만발하고 있음을 남편에게 보장해 주었다. 그가 그녀를 믿기만 한다면 세상의 어떤 것도 그를 해칠 수 없다. 제아무리 그가 깊이 갇히거나 높이 올라가더라도 그녀가 옆에서 지켜 주지 않는 순간은 잠시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남편을 감싸고 보호하는 그녀의 능력을 과시한 나머지 그녀에게는 자기 스스로를 이거라고 알아볼 만한 형해(形骸)조차 남지 않은 것이다. 모든 힘이 탕진된 것이다. 그래서 모친의 두 무릎 사이에서 몸을 굳히고 서 있던 제임스는, 모친이 장미빛 꽃이 피는 과일나무같이 돋아나 그 나무의 잎과 너울거리는 가지 사이로, 이기적인 부친의 메마른 신월도 같은 놋쇠 부리가 동정을 강요하며 파고 들고 후려치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아내의 말을 받아들인 그는, 마치 배부르게 먹은 후에야 비로소 엄마 젖에서 떨어지는 아기처럼, 겸허한 감사의 눈으로 아내를 바라보며, 생기를 되찾고, 새로운 용기를 얻고서 다시 한바퀴 돌아보았다. 아이들이 크리켓놀이 하는 것을 구경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자리를 떴다.

  아내 램지 부인의 몸은 꽃잎이 한겹한겹 오므라지듯 수축하여 전체가 피로에 지쳐 폭싹 주저앉듯이 가라앉아 노곤한 피로감에 온몸을 내맡기듯, 그림 동화책 위를 손가락으로 겨우 더듬을 정도의 힘밖에 남지 않은 듯이 보였다. 그러는 동시에 마음껏 요동치는 봄의 맥박이 성공적인 창조를 끝낸 뒤의 황홀감을 만끽하며 그 행동을 멈추어 가듯이, 그녀의 가슴속은 점점 욱신거리는 것이었다.(57~59)

 

  그녀는 화가 위에다 깨끗한 캔버스를 단단히 고정시켰다. 비록 얇은 헝겊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램지씨와 그의 강인한 요구를 막는 튼튼한 방패가 되어 주기를 그녀는 바랐다. 그가 등을 돌렸을 때 그녀는 열중하여 자기의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쪽의 선(線), 그리고 저쪽의 저 물체, 그러나 도저히 정신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가 50피트 이상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비록 말을 걸어오지 않더라도, 심지어 그가 그녀를 보지 않더라도, 그녀는 그를 의식하였으며 그는 그녀의 마음을 압박하였다. 램지씨가 있으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그녀는 색채도 선도 볼 수 없었다. 심지어 그가 등을 돌리고 있을 때에도 그녀는, 금방 램지씨가 내게로 와서 내가 줄 수 없는 무엇인가를 요구할 것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집고 있던 붓 하나를 내려놓고 다른 것을 골랐다. 언제쯤 그 어린애들이 올 것인지? 언제쯤 그들이 다 떠날 것인가? 하고 그녀는 조바심하였다. 저 양반은 남에게 베푸는 법이 없이 언제나 받기만 한다고 생각하니 슬그머니 화가 났다. 그녀는 그에게 무엇인가를 주도록 강요당할 것이다. 램지 부인도 그랬었다. 주고, 주고, 남김없이 준 다음 부인은 죽었다. ―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남겼다. 정말로 그녀는 램지 부인에 대해 화가 났다. 그녀는 손에 쥔 붓을 가늘게 떨며 산울타리, 층계, 벽 따위를 바라보았다. 이 모두가 램지 부인 탓이다. 부인은 죽었다. 이제 그녀의 나이 마흔 넷인데 여기서 아무 일도 못하고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멍하니 서서 장난을 하고 있다. ― 이 모두가 램지 부인 탓이었다. 부인은 죽었다. 부인이 늘 앉던 층계는 지금 텅 비어 있다. 부인은 죽었다.(215~216)

 

 

  『등대로』(버지니아 울프)를 읽으며 나는 내 아내의 생명력을 흡수하며 살아왔다는 걸 비로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건 끔찍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아직도 구체적으로 깨닫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일이든 아내가 못마땅해 하면 나는 그걸 참지 못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는 건, 아직도 나는 그에게 빚을 졌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 빚을 조금이라도 갚아야 한다는 초조함이나 조바심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나마 저 소설을 읽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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