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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김복희 「새 입장」

by 답설재 2025. 1. 13.

새 입장

 

 

김복희

 

 

대한민국에 사는 희망은 키가 작다. 발이 작다. 손이 작다. 그래도 성인용 속옷을 입는다. 어느 날 희망은 자신의 몸이 커졌다 느꼈다. 희망이 발을 쿵 구르자 현관 계단이 와르르 무너졌기 때문에, 희망은 드디어 내가 소인국에 왔군 올 곳에 오고야 말았어 흥분했다. 허물을 벗은 후 더 아름다운 뱀 더 커다란 뱀 태어나므로 희망은 두 발을 쾅쾅 구르며 계단을 완전히 부수고  허물을 부숴버리기 시작했다.

 

희망의 수화물에서 찾아낼 것들, 뾰족한 것, 날카로운 것, 폭발하는 것, 흔들리는 것, 살아 있는 것, 자라날지도 모르는 것. 새를 그려 넣은 것, 뱀을 그려 넣은 것, 죽음 근처에 엉켜 있는 것, 그것들 중 일부는 소시지, 곰팡이, 번데기, 씨앗으로 보인다. 다 빼앗겨도 별수 없는 것. 그러나 희망은 웃는다. 희망, 혼자라면 맨몸으로 날아갈 수도 있었으나, 희망, 에밀리 디킨슨식으로 거친 폭풍우 속에서도 누군가는 희망, 울음소리를 반드시 알아듣게 하려고, 희망,

수화물을 따로 부치고 사람들 사이로 돌아온다.

더 커질 것을 알기에 더 커져도 되는 곳, 희망에게

작은 손 작은 발의 소인들 한껏 작아져도 되는 곳,

희망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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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희  2015년 『한국일보』 등단. 시집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 『희망은 사랑을 한다』 『스미기에 좋지』. 〈현대문학상〉 수상.

 

 

 

『현대문학』 2025년 1월호.

 

 

 

 

 

격려사일까?

제목이 '희망'인 줄 알았는데 다시 읽으려고 보니까 '새 입장'이었다.

누가 얼른 바꿔놓고 갔나 싶은 느낌이었다.

'희망'이라면 좀 그렇겠지. 본래 '새 입장'이었겠지.

살다보니까 별일 다 겪는다 싶기도 하지만 살다보면 무슨 일을 겪지 않겠나 싶기도 한 것이다.